당시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다소 뜻밖의 일이었다. 한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등이 6·25전쟁을 분석한 책에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집단안보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경험’을 파병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에티오피아는 잃어버린 영토인 에리트레아 회복과 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했다. 6·25전쟁은 그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파병된 에티오피아군 6000여 명의 참전은 1954년 7월 10일까지 이어졌다. 강원 화천군과 양구군, 경기 연천군 일대가 이들의 주요 전장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총을 들고 끝까지 싸웠다. 전투는 253차례 벌어졌고, 일부 기록은 에티오피아군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겼다는 평가도 있다. 뛰어난 전공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1954년 철수할 때까지 121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을 입었다. ‘코리아(Korea)’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바쳤다.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 정부는 일정 부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파병 직후 에리트레아를 되찾았기 때문이다.숫자로 기록된 역사 뒤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눈물이 있다. 6·25전쟁 75주년을 맞아 경북 포항 양포교회 등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마미테 훈데 센베타 씨(73·여)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한국으로 떠났고, 화천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의 마지막 전장이었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의 상처로 남았다. 센베타 씨는 1974년 황제의 몰락과 함께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반역자의 딸’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함께 한국을 찾은 참전용사 틸라훈 테세마 가메 씨(100)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자 부대는 해체됐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면서 “정권이 바뀐 뒤의 삶은 참혹해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증언은 전쟁 영웅의 귀환이 반드시 영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흘러 한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다. 에티오피아에도 적지 않은 원조를 해왔다. 하지만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30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며 이번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의 방한을 도운 하옥선 선교사는 “여전히 참전용사와 후손들은 다 낡은 2평짜리 집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뉴 부대원과 그 후손들에겐 6·25전쟁의 상흔이 여전한 것이다.황성호 사회부 기자 hsh03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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