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루먼 쇼’(1998년)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행동이 생방송으로 온 세상에 알려지는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버뱅크는 자신의 삶이 생중계되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는 감시와 통제는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일상도 곳곳의 폐쇄회로(CC)TV뿐만 아니라 금융 거래, 교통카드,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다.》
개인의 신체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여러 지식이 동원된다. 플라톤의 생각과 반대로 이제부터 인간의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가령 건축학, 행정학, 심리학, 의학, 법학 등이 동원돼 감옥, 정신병원, 학교, 군대, 공장, 회사 등에서 신체를 길들이는 훈육이 이뤄진다. 훈육의 과정에서 권력은 개인을 억압하는 대신 테일러 시스템을 적용해 효율성과 노동생산성을 높인다. 신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전염병의 창궐로 개인을 공간에 가둘 수 있을 때 분명해진다. 감염을 막기 위해 개인은 집 안에 격리된 채 ‘창문’을 통해 자신의 건강 여부를 확인받게 된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은 나중에 누가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판옵티콘에서는 불가능하다. 간수는 죄수를 역광을 통해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어두운 탑 안의 간수를 볼 수 없다. 이러한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분리’, ‘시선의 비대칭성’이 판옵티콘의 핵심이다. 권력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맞서 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시탑 내 간수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판옵티콘이 잘 작동하는 이유다.
푸코가 비판한 권력은 ‘빅 브러더’가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독재와 다르다. 소설 속의 국가는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을 조작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제해 영구 집권을 계획한다. 그러나 푸코의 판옵티콘에서는 적과 동지의 피아 구별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전체주의에 맞서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옵티콘은 잔인한 처벌이 감시로 바뀌는 권력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고문이나 사형 등이 실제로 사라져 인권이 향상된 것 같지만, 전기전자 기술이 악용되면 무시무시한 전자감옥이 탄생할 수 있다.
요즘 해킹으로 인해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빈번하다. 소셜미디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위치 추적, QR코드 등을 통해 개인정보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을 때 가장 두려운 점은 권력의 본질을 모른다는 점이다. 누가 우리를 통제하고 감시하는지 모를 때 가장 불안하다. 푸코가 두려워한 미래 사회 모습은 감시자 없이 자동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고, 자기 통제를 하는 것이다. 판옵티콘의 가장 완벽한 통제 방식인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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