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데모크라시’의 경쟁력, 시민이 지키고 정치가 응답할 때[기고/문휘창]

4 days ago 2

문휘창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석좌교수·서울대 명예교수

문휘창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석좌교수·서울대 명예교수
영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의 경제 성공을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다. 강연 후 한 청중이 질문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뒀지만, 민주주의는 영국에 비해 뒤처진 것 아닌가요?”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렇게 답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30여 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영국과 비교된다는 점 자체가 한국 민주주의의 놀라운 진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청중은 미소를 지으며 공감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K-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새로운 모델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규율과 열정이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시위 문화를 발전시켰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이후 탄핵 과정에서 시민들은 강렬한 의사 표현을 폭력 없이 표출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이후 우려했던 소요 사태도 없었다.

특히 지난해 12·3 비상계엄 이후 한국의 시위 문화는 세계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첫째, 시위에 나온 시민들은 강력한 주장을 펴면서도 평화적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인도 독립을 위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과는 다르다. 당시 인도는 대영제국의 군사력 앞에서 비폭력이 유일한 선택지였지만 한국의 시위 군중은 강력한 힘이 있음에도 자발적으로 비폭력을 택했다.

둘째, 절제된 치안 유지다. 경찰은 시위에 앞서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상충하는 시위 집단을 분리하고 교통 통제 등으로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시위 중에도 경찰의 개입은 최소화하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져 폭력이나 인명 피해를 방지했다.

셋째, 집단적 규율이다. 참가자들은 강한 협력의식을 바탕으로 물자를 공유하고 시위 후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높은 집단적 책임감을 보여줬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은 시위를 시민의 자부심과 공유된 정체성의 강력한 표현으로 승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축제적 활력이다. 이는 참가자 간 공유된 목적의식을 강화하며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인식을 효과적으로 높여줬다. 문화적 표현과 정치적 참여의 결합은 한국 시위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며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어 단어 ‘democracy’에서 ‘demo’는 민중을, ‘cracy’는 지배를 뜻한다. 즉, 데모크라시는 소수의 정치인이 아닌 민중이 주도하는 체제다. 한국에서는 소수 정치인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민주주의가 쉽게 후퇴하지 않는다. 오히려 높은 시민의식과 적극적인 참여가 K-데모크라시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최근 K-데모크라시는 또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했다. 계엄 이후 6·3 대선까지 6개월간 국가가 혼란과 분열로 어수선했지만, 국민들은 지지했든 그러지 않든 새 정부 출범을 환영하며 민주주의의 회복 과정을 빠르게 보여주고 있다. 정치 불안과 폭력 시위로 얼룩진 세계에서 한국의 대중 민주주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고 있다. K컬처로 시작된 한류는 K푸드, K기술을 거쳐 이제 K-데모크라시로 확장되며 다양한 영역에서 자리 잡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정치인은 국민들의 높은 시민의식과 민주적 요구를 받들고, 국민은 정치인의 책임 있는 행동을 지지하는 선순환을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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