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글로벌 경쟁력 중심 영상 콘텐츠, 산업 혁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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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한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K-콘텐츠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수많은 이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훌륭한 콘텐츠를 꾸준히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현장에서는 위기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이 현실이다.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는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한류의 도약에 대한 장밋빛 전망 이면에는 소수의 성공에 가려진 산업의 구조적 한계와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원인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기존에 한국 영상 콘텐츠 산업을 굳건히 지탱해왔던 내수 시장이라는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고, 멀티플렉스 극장 2~3위 사업자는 합병을 추진한다. 관객과 시청자의 소비 행태 역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이제 웬만한 대작으로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기 어려워졌으며, 긴 호흡의 작품 전체를 감상하기보다는 짧게 편집된 요약본이나 클립 영상을 소비하는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일상의 틈새를 빠르게 채워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콘텐츠 소비 시간의 변화를 넘어, 서사의 가치를 평가하고 몰입하는 방식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나아가, 즐길 거리가 다양해지면서 과거 미디어에 집중되었던 대중의 주목은 이제 다채로운 오프라인 문화 경험의 형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콘텐츠는 이제 다른 콘텐츠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모든 것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료=영진위자료=영진위

이처럼 내수 시장에서의 안정적인 소비와 주목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글로벌 시장으로 향하게 된다. 분명 K-콘텐츠는 글로벌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정 작품들은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K-콘텐츠의 위상을 높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인 성공 사례들이 산업 전체의 상업적 성공을 온전히 증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여전히 K-콘텐츠의 소비 범위는 아시아 시장에 머무르고 있다. 더 큰 시장에서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증명하지 않고서는 현재 수준을 넘어서는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글로벌 사업을 위한 기반이 불충분하다는 한계도 명확하다. 아직 중장기 관점으로 IP에 투자하고 다각화된 콘텐츠 전략을 추진할 여력도, 경험도 부족하다. 일부 K-콘텐츠가 보여준 '가능성'과 실제 성과 사이에는 여전히 메워야 할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기반이 무력화 되었다면, 우리는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방향과 전략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내수 시장에서의 성공 방식에 근거한 관성적인 접근으로는 글로벌 시장에 적합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기 어렵다. 특정 사업자에게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규제가 이미 떠나간 시청자와 광고주를 되돌려 주는 것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외부의 개입이나 섣부른 규제가 아니라,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건강한 산업 내부의 조정 노력이다. 산업의 각 주체가 위기를 직시하고, 생존과 성장을 위해 혁신을 위한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자료=콘진원자료=콘진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핵심적인 전제는, 이미 한국 영상 콘텐츠 산업이 국내 시장 만으로는 더 이상의 성장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방향을 되돌릴 수 없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위한 구조를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의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많은 작품이 해외 시장에 판매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더 큰 자본의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해외 자본의 유입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산업 전반이 질적으로 성장하며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내 자본에게도 영상 콘텐츠 산업이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은 '산업'이란 표현이 민망할 만큼, 여러 중복 규제들이 겹쳐 있다. 다른 투자처에 비해 콘텐츠 분야가 더 매력적인 투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선 우리가 가진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현재의 문제는 '창작 역량'의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진짜 문제는 이 창의적 역량을 지속 가능한 산업적 성장으로 전환시키는 '비즈니스 역량'의 부재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답을 내놓지만,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판을 키울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서툴다.

변화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역량을 갖춘 여러 분야의 인재들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산업에 몸담으면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할 기회가 열려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인재란, 단지 창작자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능력과 그 작품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역량이다.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점차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체계를 발전시켜가는 과정 중에 있다. 글로벌 팬덤의 마음을 읽고 움직이는 마케터, 복잡한 권리 관계를 검토하고 글로벌 사업자들과 협상을 지원하는 법률 전문가, 글로벌 프로젝트의 파이낸싱을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금융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가 더 강화해 나가야 할 '글로벌 경쟁력'의 복합적인 차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책의 역할도 바로 이러한 글로벌 경쟁력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단기적인 창작 기회의 축소에 대응하기 위해선, 기업들이 콘텐츠 투자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세액 공제와 같은 실질적인 인센티브의 확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수익성에 얽매이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IP의 가치를 키우는 프로젝트에 기업들이 뛰어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의 완화를 통해 보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가능한 판을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활성화 하기 위해선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지역별 특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보 제공 및 현지 대응을 위한 지원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진정한 콘텐츠 산업의 위기는 제작 편수가 줄거나 수익이 감소하는 단기적인 현상이 아닌, 창의적인 인재가 더이상 유입되지 못하며 기업이 혁신 역량을 상실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지금은 과거 국내 시장 중심의 낡은 사고의 틀을 버리고, 글로벌 시장을 고려한 경쟁력 있는 콘텐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sky153@knou.ac.kr

〈필자〉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디어-콘텐츠 정책 분야와 미디어 역사 분야에서 다수의 연구를 수행해왔다. 문화정책 분야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콘텐츠 산업 현장의 변화를 정책의 언어로 담아내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주요 연구로는 '한국 신문의 사회문화사'(공저, 2013), '언론사 문화사업의 역사와 사회적 의미'(공저, 2014), '콘텐츠 산업 트렌드 2025'(공저,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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