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년(1695년)부터 병자년(1696년)까지 한반도를 강타한 ‘을병 대기근’은 내부 역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조정은 왕실 재정을 줄이고 비축미를 풀었으며, 신분과 관직까지 팔아 재원을 마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외부에서 곡식을 들여오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청나라’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조정 내에 반대 여론이 거셌다. ‘큰 나라와 무역하면 작은 나라가 손해 본다’는 경제 논리도 있었지만, 본질은 ‘오랑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었다. 교착을 푼 것은 대사간 박태순의 두 번째 상소였다. 그는 곡물 도입을 구걸이 아니라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통하게 해 이익을 나누는” 통상적 무역으로 규정했다. ‘청의 시혜를 받는다’는 프레임을 ‘이웃 국가 간 거래’로 전환한 것이다. 명분의 무게를 덜어낸 이 한 번의 재정의가 숙종의 결단을 끌어냈고, 조선은 청에 공식 사신을 보냈다.
청나라 4대 황제였던 강희제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예부의 반대에도 그는 개시(開市)를 허락하고 육로와 해로로 각 2만 석을 보냈으며, 여기에 무상 1만 석을 추가로 제공했다. 황제는 직접 ‘해운진제조선기’를 지어 이를 기록했는데, 그 행간에는 번국의 위기를 구제해 제국의 위상을 다지려는 정치적 계산이 읽힌다. 선의(善意)와 통치술이 겹쳐 있었던 셈이다.그러나 황제의 호의는 현장에서 변질됐다. 해상 운송을 감독한 청 이부시랑 도대(陶岱)는 해운미 가격을 이미 사들인 육운미보다 높게 책정하고, 청 상인이 사사로이 가져온 물화를 비싸게 사라며 무상미 1만 석을 볼모로 잡았다. 상인과 짜고 폭리를 노린 것이다.
협상에 나선 우의정 최석정은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그는 청 상인 역시 상품을 소화하지 못하면 손해라는 점을 간파하고, 사사로운 거래를 받아주는 대신 해운미 가격을 육운미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현대 협상론으로 보면 상대의 대안 부재, 즉 약한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를 역이용한 셈이다. 협상이론에서 BATNA는 합의가 깨졌을 때의 차선책을 뜻하는데, 최석정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편의 BATNA가 빈약하다는 점을 지렛대로 삼았다.
진짜 시련은 그다음이었다. 도대가 보낸 서한에서 자신을 ‘권제(眷弟·인척 동년배에게 쓰는 겸양 표현)’라 칭한 사실이 드러났다. 청의 차관급 신하가 조선 국왕과 맞먹은 것으로, 외교적 결례를 넘은 모욕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동해 물을 다 기울여도 씻기 어렵다”며 격앙했고, 협상 책임자 최석정에게 40여 일간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최석정은 판을 엎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명첩을 찢는 것이 시원한 줄 모르지 않았으나 극력 다투면 곡식 도입이 어그러져 백성 구제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차라리 내가 처벌받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현안을 마무리한 덕에 북쪽 지방을 중심으로 구휼미가 배급돼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건졌다.숙종은 이런 최석정이 고마웠지만 끝내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숙종은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니 지금 논의는 지나치다”며 두둔했지만, 강경파의 파상공세를 끝내 막지 못했다. 최석정은 7월에 삭탈관직(削奪官職)됐고, 8월에 문외출송(門外黜送)됐다. 더 뼈아픈 것은 낙인의 대물림이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주장한 할아버지 최명길과 묶여 “집안 내림으로 오랑캐에 영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나라를 지킨 할아버지와 백성을 살린 손자가 나란히 매국노로 손가락질당한 것이다.
이 사례는 오늘의 조직에 세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조직의 생존보다 우선하는 명분은 없으며, 위기에는 실용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박태순의 프레임 전환, 숙종의 결단, 최석정의 교섭은 모두 이 유연성의 산물이었다. 둘째, 위기의 실무 책임자는 자존심보다 결과를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결정권자가 그 실무자를 보호하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최명길, 최석정 두 조손(祖孫)이 고초를 겪은 뒤 국가적 난국에 기꺼이 자신을 던진 인물이 드물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파격적 대안일수록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을 막아주는 것은 리더의 몫이다.
| ※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41호(5월 2호) ‘백성 살리려면 원수와도 손잡을 수 있어야’를 요약한 것입니다. |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akademie@skku.edu
정리 =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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