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년 2월 카단의 침략…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않은 허공[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1 month ago 7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1287년에 몽골의 동방을 맡고 있던 옷치긴 왕가의 나얀이 쿠빌라이 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나얀은 두 달 만에 쿠빌라이에게 사로잡혔고 바로 처형됐다. 이 반란은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이 반란은 쿠빌라이가 요동 지방을 다스리는 동방왕가의 권한을 축소시키려 한 데 대한 반발이었기 때문에 나얀의 처형 이후에도 잠잠해지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둘째 동생 카치운의 후예인 카단(哈丹)이 반란군을 이끌었다. 카단은 송화강과 흑룡강 쪽으로 후퇴하면서 저항을 계속했다.

고려의 북쪽 지역에서 펼쳐진 반란의 여파가 고려에 미치지 않을 순 없었다. 1290년 1월에 카단의 군이 고려의 동북쪽으로 침입할 우려가 있어서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고려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정예군을 선발하고 지휘체계를 정비한 뒤 북방에 군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충렬왕은 고려에 있지 않았고 개경은 첨의중찬 허공과 첨의찬성사 홍자번이 지키고 있었다. 반란군이라고는 해도 30년을 싸웠던 몽골군임은 분명했다. 고려 조정도 공포에 휩싸였다. 2월, 카단군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홍자번은 즉시 강화로 피란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공은 반대했다.

“지금 국왕이 원나라 수도에 계신데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제멋대로 국도를 옮길 수 있습니까? 불가합니다.”

홍자번이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즉시 수도를 옮겨야 합니다.” 다른 대신들도 홍자번 편이었다.

허공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탄하며 말했다. “중론이 이와 같으니 막을 수가 없겠습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십시오. 나는 송도를 지키며 왕명을 기다릴 것입니다.”

허공 묘지석.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허공 묘지석.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허공은 겸손하면서도 불의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신정권의 수장이었던 임연이 허공의 딸을 며느리로 맞으려 했으나 허공은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했다. 임연은 그를 원망했지만 너무 유능한 사람이어서 내칠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카단군이 쳐들어오는데 송도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니 대신들이 혀를 찼다. “허공이 나라를 진정시킨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나라를 망치려 하는구나.” 하지만 허공은 그런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가서 식구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송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중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 식구가 아니다.”

허공이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고 있으니 섣불리 송도에서 떠나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원나라에서 장군 인후가 귀국했다. “황제 폐하께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다는 말을 들으시고 정말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면 잡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허공의 지혜와 식견에 감탄하였다. 허공은 진짜 카단군이 침공하자 군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다가 숨졌다. 이처럼 진짜 위기 앞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오늘날 온갖 허위정보와 선전선동의 거짓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습격하자는 선전선동도 허위정보에 근거해 일어나고 있다. 유언비어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한 허공 같은 강직한 어른이 그리운 나날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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