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금 한 달 뒤인 지난해 1월 이 전 대사에 대한 외교부의 공관장 자격심사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행정안전부 공무원 등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는 대사 후보자의 업무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한다. 부적격 결정이 나오면 내정 취소다. 위원 7명 이상이 출석해야 하는데 이 전 대사에 대해선 대면 회의 없이 서면으로만 진행됐다. 게다가 서류엔 이미 ‘적격’으로 적혀 있고, 부적격 의견을 낼 공란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답정너’ 심사표를 받은 위원들은 빈칸에 서명만 했다.
▷심사 당시 이 전 대사는 공수처가 출국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대사가 해외에 나갈 수 없으니 ‘적격’일 수 없는 후보자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임명을 강행한 뒤 법무부를 통해 출금까지 해제해줬다. 임명 전엔 출금 사실을 몰랐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얘기다. 수사기관의 출금 요청을 승인하는 부처가 다름 아닌 법무부다. 또한 대사 임명 전 출입국에 문제가 없는지, 수사 대상인지도 확인하도록 돼 있다.
▷졸속 심사를 거쳐 호주에 부임한 이 전 대사는 11일 만에 귀국했다. 지난해 3월 말 총선을 앞두고 ‘런종섭’ 사태가 최대 악재로 부상하자 그의 귀국을 위한 회의가 급조된 것이다. 방산 협력을 내세워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폴란드 등 6개국 공관장만 급히 불렀는데 이렇게 특정 공관장들만 국내로 소집한 전례가 없다. 이 전 대사는 회의 다음 날 비판 여론에 떠밀려 사임했다. 대사 재임 기간이 3주도 안 된다. 호주에선 “외교적 신뢰 훼손”이란 비판이 일었다.▷대사 임명을 둘러싼 넉 달간의 소동의 배후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 ‘VIP 격노’가 있었던 회의 도중 이 전 대사에게 ‘02-800-7070’으로 전화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조태용 전 국가정보원장은 윤 전 대통령이 이 통화에서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이 전 대사를 질책했다고 특검에 진술했다고 한다. 윤 전 대통령의 수사 외압 여부를 잘 아는 이 전 대사를 빼돌리기 위해 공관장 심사위원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공수처의 출금 조치를 무력화시켰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대통령 한 사람의 격노에 국가 시스템이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져선 안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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