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수의 재계 인사이드] 시장 흔드는 '그림자 내부 거래'

2 weeks ago 7

[황정수의 재계 인사이드] 시장 흔드는 '그림자 내부 거래'

‘그림자 내부 거래’(shadow insider trading)란 말이 있다. 업무 과정에서 습득한 미공개 정보를 활용해 자기 회사가 아닌 경쟁사 주식을 매매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는 불공정 거래 행위를 뜻한다. 한국에선 생소하지만 미국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불공정 거래 행위다. ‘월스트리트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뉴욕 남부지방검찰청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악질 불법 행위로 보고 집중 감시에 나설 정도다. 자기 회사 주식을 거래하는 통상적인 내부 거래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는 점에서 ‘신종 지능 범죄’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에선 부당 수익의 3배 벌금

그림자 내부 거래자를 단죄한 사례는 여럿 나왔다. 2016년 불거진 ‘매슈 파누와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항암제 개발사 메디베이션 임원이던 파누와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세계적 제약사 화이자에 인수될 것이라는 내부 정보를 입수했다. 그렇다고 메디베이션 주식을 사들이면 미공개 정보 이용 혐의로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는 터. 파누와트는 경쟁사 주식을 떠올렸다. 화이자가 거액에 메디베이션을 사들이면 경쟁사도 ‘항암제 테마’로 엮여 주가가 동반 상승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게 항암제 개발사 종목을 담은 펀드 주가가 오르면 이익을 내는 옵션을 매수했다.

그해 8월 화이자는 140억달러(약 20조원)에 메디베이션을 인수했고 파누와트는 총 12만달러(약 1억7000만원)의 단기 수익을 거뒀다. 하지만 SEC에 꼬리를 밟혔고 2021년 8월 민사소송이 시작됐다. 2024년 9월 법원은 파누와트의 내부자 거래 행위를 인정하고 부당이득의 세 배에 해당하는 민사 벌금을 부과했다.

그림자 내부 거래 얘기를 꺼낸 건 최근 한국 자본시장에서도 비슷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어서다. 법조계와 산업계 일각에선 A사가 올 들어 B사의 지주사 주식을 매입한 것을 두고 그림자 내부 거래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다.

상황은 이렇다. A사는 지난 2월 B사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수해 2%대 중반 지분율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A사는 투자 목적을 “B사의 성장성을 긍정적으로 본 데 따른 단순 투자”라고 했다.

A사 설명대로 B사의 경쟁력과 해당 산업 성장성을 높이 산 ‘단순 투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미국의 그림자 내부 거래 잣대를 들이대면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고 법조계는 설명한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지만 당시 A사는 B사와의 기술 특허 침해 소송 판결 결과를 기다리던 때였다. B사가 승소한 바로 그날 주가는 19%나 올랐다. A사는 소송에서 졌지만 B사 지분 투자로 그날 하루에만 280억원 상당의 평가 이익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A사는 특허 소송의 승소 여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당사자였다. 만에 하나 A사가 자사의 패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B사 주식을 매수했다면 그림자 내부 거래로 볼 여지가 크다고 법조계는 설명한다. 경찰이 또 다른 기술 탈취 혐의로 A사를 조사하는 것도 그림자 내부 거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만약 A사의 혐의가 인정돼 B사에 배상 책임을 지면 B사 주가는 다시 한번 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거래 처벌 규정 마련해야

경쟁업체인 A사의 지분 매입으로 불편했던 B사는 A사의 주식 매입이 그림자 내부 거래에 해당하는지 다각도로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림자 내부 거래를 규제하는 법령이나 판례가 없는 탓에 손을 놨다고 한다. 미국과 달리 우리 자본시장법은 불법 내부 거래를 ‘자사 주식을 매매하는 경우’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은 신뢰로 먹고사는 곳이다. 불공정 거래 의혹이 불거져도 처벌 조항이 없어 손을 못 쓴다는 건 금융투자 선진국을 꿈꾸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A사가 정상적 투자를 했는데도 괜한 의혹을 받는 건지, 실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경쟁사 주식을 산 건지를 파악하는 일은 한국 자본시장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래야 갈수록 교묘해지는 자본시장 불법 행위를 엄단하고 거래 질서를 투명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의 자본시장 1호 공약이 ‘코스피 5000 시대’ 같은 뜬구름 잡는 선언이 아니라 ‘불공정 거래 엄단’이 돼야 하는 이유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