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코스프레·체리피킹 전락한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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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칼럼] 코스프레·체리피킹 전락한 보수주의

보수주의가 처음부터 일목요연한 이론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관습과 전통의 집합물이고, 개인 삶과 문명이 스며든 결과물이다. 로버트 니스벳은 보수주의를 “사회는 언제든지 개조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고, 시대 불문의 보편 가치를 잣대 삼아 사리 분별과 신중함으로 모순을 개선하려는 정신”이라고 봤다. 보수주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도 “사회는 이성이 아니라 도덕·관습에 의해 재생산되고, 문명의 진보는 사회 안정을 통해 가능하며, 전통은 한 세대만의 이성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그가 급진적인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이유다. 진보가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등 목적을 정해 놓고 현실을 맞춰가는 연역적인 데 반해 보수는 자생적 질서 속에서 체화된 것을 수용하는 귀납적이다.

이런 고전적 보수주의를 바탕으로 미국과 영국에선 현대 보수주의를 재정립했다. 러셀 커크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간 논쟁 등을 거쳐 보수주의가 자유주의와 연합해 큰 정부 반대와 개인의 자유 중시에 공감했다. 배리 골드워터가 <보수주의자의 양심>에서 제시한 것도 작은 정부, 개인 역량과 창의가 발휘될 수 있는 자유시장 경제 등이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의 결정체인 ‘샤론선언문’에도 인간의 자유와 시장경제 존중 정신이 담겨 있다. 물론 자유는 방종과 구분되며 엄격한 책임이 따른다.

전체주의와 독재 배제, 법치 존중 등도 현대 보수주의의 정신이다. 이런 보수주의 정신은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이끈 원동력이다. 영국 보수당 대표이던 마이클 하워드가 제시한 ‘누군가의 가난이 다른 사람이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믿지 않는다’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다’ ‘국민은 커야 하고 정부는 작아야 한다고 믿는다’ 등 16개 항의 보수주의자 신조도 보수의 바이블로 통한다.

미국과 영국의 현대 보수주의는 치열한 논쟁과 고민 끝에 이렇게 재탄생했는데, 우리는 어떤가. 보수 본류라고 자임하는 국민의힘부터 돌아보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국민의힘 소속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은 제도의 안정성과 절차, 과정을 중시하는 보수의 가치를 정면 훼손했다. 법치보다 인치라는 흑역사도 남겼다. 대선 후보 경선과 단일화 과정에서 벌어진 행태는 자기 책임 실종이다. 공공을 위한 가치 공유가 아니라 사적 기득권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처럼 비친다.

개인 삶의 책임을 국가와 사회로 돌리는 진보좌파와 달리 자신의 노력으로 보상을 얻고, 부족한 이들은 보듬는 게 보수다. 그런데 국민의힘 전신 정당은 좌파가 무색할 정도의 경제민주화 구호를 외쳤고, 사회적 경제기본법까지 내놨다. 이번 대선에서도 5인 이하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기초연금 인상, 무료 버스 등 반시장 공약이 이어진다. 보수 가치에 충실하지 못하니 진보좌파 정당과 이념 경쟁에서 제대로 싸움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자생적, 점진적, 질서 있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시대 변화에 맞는 보수 가치를 선보이지 못하고 ‘보수=수구’ 이미지와 국가주의, 권위주의라는 부정적 유산에 여전히 갇혀 있다.

국민의힘을 극우로 몰고 보수 역할까지 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도 얼치기인 것은 마찬가지다. 보수와 중도, 진보를 아우르는 목적이 사회 통합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진보가 보수 코스프레 하거나 보수가 진보 코스프레를 하는 차원을 넘겠다’며 보수 인사들을 줄줄이 영입하고 있다.

그런데 헷갈린다. 이념은 사람이 아니라 가치로 증명해야 하는데 보수다운 정책은 보일 듯 말 듯하다. 기업에 가선 친기업과 성장을 외치고, 노동계를 만나선 반기업적인 노란봉투법 실현을 약속한다. 가맹점주에게 단체교섭권 부여, 주 4.5일제, 투자와 기업 성장동력을 약화시킬 상법 개정안, 기본사회 등 반시장적 정책들이 훨씬 도드라진다. 보수의 핵심인 법치를 파괴하는 시도도 곳곳에서 일어난다. 실용이 무원칙일 땐 포장일 뿐이다.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보수는 여전히 코스프레, 선거에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체리피킹’ 대상에 그치는 듯하다. 3년 뒤면 헌정 80주년을 맞는다. 제대로 된 보수 논쟁이라도 한 번 벌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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