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권 뿌리고 가정 체험 상품까지… 관광객 유치 경쟁에 나선 경성[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3 hours ago 1

日 만주-조선 아우른 관광 유행… 경성 패싱하는 ‘北鮮 루트’ 등장
상공업자 주도 관광협회 조직해… 상점 알선 등 경성을 관광 상품화
청자 등 기념품 산업이 이익 누려… 日 패전 국면에 ‘관광 경성’ 종막

1920년대 중반 일본여행협회(JTB)가 서양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제작한 경성관광지도 영문판.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 중반 일본여행협회(JTB)가 서양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제작한 경성관광지도 영문판.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패싱 위기’ 경성의 관광객 쟁탈전

관광은 근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자본주의 대중사회가 형성되고 새로운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관광은 비로소 가능해졌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관광은 이를 모델로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에 전파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일본에서는 만주, 조선을 아우른 관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경부선과 경의선을 따라 경성, 평양 등 조선의 주요 도시를 거쳐 만주로 넘어가는 동선이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일본 정부는 국민 교육 및 서양과의 교류의 폭을 넓히는 수단으로 관광을 중시했다. 1912년 일본 철도원이 후원해 관광산업 진흥을 담당하는 사단법인 일본여행협회(Japan Tourist Bureau·이하 JTB)를 설립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였다. JTB는 같은 해 연말 중국 다롄과 경성, 타이베이에 지부를 설치했다. 경성 지부는 총독부 내에 자리 잡았다. 관광 산업이 철도와 긴밀하게 관련돼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관광 선전을 비롯해 단체 관광단 조직, 탑승권 구매 대행, 숙박 알선 등 다양한 업무를 했다. 1933년에는 경성부와 경성상공회의소가 협력해 경성관광협회를 조직했다. 새 조직의 탄생에는 이 무렵 일본과 만주를 잇는 새로운 교통로의 출현이 있었다. 일본 니가타(新潟)항에서 조선 북부의 함경북도 청진·나진·웅기 등을 직항으로 연결하고, 거기에서 철도를 이용해 만주로 가는 코스였다. 이른바 ‘북선(北鮮) 루트’다.

경성관광협회가 1933년 경성역에 마련한 관광안내소. 교통 거점에서 지리를 안내할 뿐 아니라 숙박, 상점, 관광 상품을 연결하며 관광객 유치를 본격화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경성관광협회가 1933년 경성역에 마련한 관광안내소. 교통 거점에서 지리를 안내할 뿐 아니라 숙박, 상점, 관광 상품을 연결하며 관광객 유치를 본격화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북선 루트의 활성화는 경성으로서는 안 좋은 신호였다. 그동안 일본에서 만주로 가려면 경성을 반드시 통과했지만, 북선 루트는 경성을 ‘패싱’하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경성의 상공업자들이 주도해 경성관광협회를 조직한 데에는 경성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경성관광협회는 출범과 동시에 경성역에 관광안내소를 만들고 활동에 들어갔다. 안내소는 경성 지리 안내, 교통수단과 여관 소개, 기념품 상점 알선 등 오늘날 관광안내소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눈에 띄는 것은 조선 가정집 생활 체험까지 제공한다고 선전한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신청과 사전 교섭이 필요하므로 갑작스러운 신청은 수용할 수 없다는 안내가 있다. 획기적인 관광상품 개발의 의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경성관광협회, 1937년 발간 ‘관광의 경성’).

협회의 활동은 경성 관광 활성화에 효과가 있었다. 1935년 4월 19∼25일 경성 단체관광객에게 일본여관과 조선여관, 선사품 판매점, 유람버스, 백화점, 카페, 조선요리점, 내과의원, 여행용품 상점, 사진관, 조선 인삼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할인권을 배포했다. 협회는 관광객이 “경성에 뿌리는 돈은 30만 원에 달하리라”라고 예상하며 시내에 “황금우(黃金雨)”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동아일보, 1935년 4월 17일).

실제로 그해 4, 5월 꽃놀이철 경성을 찾은 관광객은 151개 단체, 8689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한 수치다(조선일보, 1935년 6월 6일). 1937년에는 “관광데이를 개최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관광의 밤’ 야간 영화, 무용 감상회 개최, 관광 스탬프 제작, 트렁크 배송 서비스, 홍보물 제작, 라디오 관광 강연, 여관 종업원 서비스 강습회 개최 등을 준비했다(조선일보, 1937년 1월 21일). 이를 통해 “여관과 교통기관, 상점가 등의 번영에 많은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 관광산업 활성화에 따른 번영을 기대한 상점은 다양했지만, ‘오미야게(おみやげ·기념품) 상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경성의 기념품 상점은 일본인 상권의 핵심인 남대문통과 본정통에 모여 있었다. 관광객의 다수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유명한 곳이 본정 2정목에 위치한 해시상회(海市商會)였다. 설립자 우미이 벤조(海井辨藏)는 1892년 일본 오사카에서 상점을 열었고, 한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발발 즈음인 1904년 조선으로 건너와 식품 잡화상을 운영했으나, 1907년부터 지방을 돌며 공예품을 수집해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경성의 기념품 상점 해시상회(海市商會)의 홍보 팸플릿.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본정 2정목에 상점 위치(점선 원 안)를 또렷하게 표시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기념품 상점 해시상회(海市商會)의 홍보 팸플릿.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본정 2정목에 상점 위치(점선 원 안)를 또렷하게 표시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해시상회가 제작한 홍보 팸플릿을 보면 앞면에는 경성 관광 안내 지도가 실려 있고, 상회의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뒷면에는 판매하는 기념품의 목록과 용량, 가격 등이 정리돼 있다. 해시상회는 청자, 백자, 나전칠기, 신선로, 조선 인형, 조선 인삼, 조선 명산주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했다.

“조선 물산 토산품의 대량 생산, 염가 대판매” “해시상회는 원조입니다” “해시상회는 다년간 조선 물산의 보호, 조장에 전력을 기울여 조선 컬러의 발휘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등의 선전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해시상회는 일찍부터 기념품을 직접 제작했다. 그중에서도 ‘주력 상품’은 일본인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고려청자였다. 해시상회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12년 동사헌정(東四軒町·현재 중구 장충동)에 공장을 세우고 청자의 재현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조선 고미술의 부흥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듣기까지 했다(부산일보, 1918년 11월 7일). 1930년 상공장려관이 주관한 공예품 품평회에서 해시상회의 중역인 이와미야 쇼베에(巖宮庄兵衛)가 제작한 청자 화병이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에는 해시상회의 기술자 최창성이 표창장을 받았다(동아일보, 1930년 10월 23일, 1934년 3월 31일).

‘작품’을 뽑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기록도 있다. 1932년 제11회 선전에는 우미이가 청자 화병을, 1939년 제18회 선전에는 이와미야가 연적을 출품해 입상했다. 그런가 하면 청자로 만든 말차 다기(抹茶茶碗夏冬), 도쿠리(德利), 오비도메(帶止·일본 전통 의상의 허리띠 고정 장신구) 등을 판매한 것도 눈에 띈다. 관광 상품으로 일본화한 청자인 셈이다.

경성의 관광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존재했다. 경성관광협회 이사로 선임된 친일 지식인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관광협회 발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 호텔에 갔다. 이 협회의 목적은 조선에서 여행자들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동일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초청된 모든 다른 협력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은 돈으로 도움을 주는 것 말고는 그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조선 속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 속담을 다음과 같이 변경할 수 있다. 우리는 떡을 제공하고 굿을 하고 무당이 떡 먹는 것을 본다.”(윤치호 일기, 1933년 5월 9일)

1936년의 한 조선어 언론의 사설은 “야앵(夜櫻) 관광단이 경성에 범람하여 대혼잡 상태를 일으”키는 것은 “무의의한 경제적 소비”, “철도국이 그 수입을 증가하는 방편”에 불과하며, “관광 여객의 유치 흡수라는 것은 각국이 다 경제상으로 여행자의 포케트를 털어내려는 목적으로 힘쓰는 사업”이라고 비판했다(조선일보, 1936년 7월 9일). 경성의 관광 활성화는 결국 주로 일본인이었던 관광 관련 업자의 이익일 뿐이라는 속내가 드러난다.

1930년대 후반 이래 침략전쟁의 와중에도 관광 활성화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려는 관련 업자들의 활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관광의 동력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1944년 8월 경성관광협회는 경성전시(戰時)교통협력회라는 전쟁 협력 조직으로 개편됐다. 이로써 ‘관광의 경성’의 꿈은 종막을 고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