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 5번 출구를 나와 청계천 쪽으로 100m쯤 직진하다가 동묘벼룩시장 골목으로 걸어가면 오래된 LP판, 군복, 중고 카메라, 1970∼80년대 전자제품, 낡은 구두와 모자가 뒤섞인 풍경이 펼쳐진다. 물건마다 풍진 세파 속에서 고유한 서사가 켜켜이 배어 있다. 눈은 즐겁고 마음은 고즈넉한 구경을 하며 중고시장 골목을 몇 시간쯤 돌다 보면 배도 고파진다. 그 허기는 이상하게도 물리적인 허기라기보다는 감상적인 허기에 가깝다. 분주한 추억 여행 속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향하는 식당이 바로 대박 왕돈까스다.
시장 골목의 노포답게 야외까지 테이블을 배치한 이곳은 크지 않고 화려한 인테리어도 없다. 메뉴판도 단순하다. 하지만 접시에 올라오는 돈까스는 중년 이상 세대에겐 학창 시절을 불러오는 하나의 ‘시그니처’다. 요즘 유행하는 두툼하되 미니멀한 ‘일본식 돈카츠’와는 전혀 다르다.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듬뿍 입혀 바삭하게 튀긴 뒤, 넓은 접시 한가운데 놓고 육수와 물엿 등으로 농축한 전통 브라운 소스를 넉넉하게 부어 준다. 그 옆에는 빠질 수 없는 세 가지 구색이 따라온다. 양배추 샐러드, 마카로니, 그리고 단무지다. 이 구성이야말로 1980∼90년대 경양식집 돈까스의 정석이다. 손님들의 평가도 흥미롭다. 레트로 열풍에 올라탄 젊은 세대는 돈카츠와 다른 색다른 맛을 이야기한다. 장년층과 노년층 입에선 “이거 옛날 돈까스다”, “학생 때 먹던 그 맛 그대로네” 같은 말들이 나온다.그들의 추임새에는 단순한 미각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1980∼90년대 한국에서 돈까스는 지금보다 훨씬 특별한 음식이었다. 학교 시험이 끝난 날, 아버지가 월급을 받은 날, 혹은 어쩌다가 단체 미팅 같은 것이 잡힌 날 가던 시내 경양식집의 상징적 메뉴였다. 흰 접시 위에 커다란 돈까스 한 장이 올라오면 그날은 마법처럼 평소보다 특별한 날로 변신한다.
이 집 돈까스는 그 기억을 그대로 복원한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약간의 산미가 있는 소스도 옛날 그대로고, 튀김옷은 과할 정도로 두껍지 않으면서 크리스피하다. 튀김옷 안의 고기는 두툼하면서도 큼지막하다. 그래서 칼로 썰 때 ‘사각사각’거리는 느낌이 난다. 어떤 손님은 맛있다기보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요즘 서울에서 돈까스 1인분 한 접시는 보통 1만 원을 훌쩍 넘지만, 이 집은 ‘왕돈까스’ 기준 1만 원을 내면 2000원을 거슬러 받는다. 2000원이면 동묘에선 커피나 식혜 한 잔을 사 마실 수 있으니 식객들 마음이 얼마나 넉넉해지겠는가. 동묘벼룩시장이 물건을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이라면, 대박 왕돈까스는 향수를 충족시켜 주는 시간 여행이다.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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