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혜 채용-부실 관리에 선관위 신뢰 약화돼
음모론 근거 없지만 시스템 검증도 피해 와
사전투표 데이터 등 철저한 검증 필요한 때
‘음모론’을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처음도 아니다. 부정선거 의혹 제기는 2002년 대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은 전자개표기가 처음 도입된 선거이면서 인터넷 보급 이후 치러진 첫 대선이기도 하다. 이후 기억나는 것만도 2012년 대선, 2020년 총선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 제기가 있었다.
모든 음모론의 전개 양상은 닮은꼴이었다. 우선 ‘과학’이 등장한다. 2012년 대선 때는 모 방송사의 시간대별 누적 득표율 그래프가 문제였다. 그런 매끈한 ‘로지스틱’ 커브는 도저히 나올 수 없고 특정 시점 이후부터는 득표율이 ‘픽스’되어 있었다는 ‘통계학 좀 해 본 듯한 누리꾼’의 그럴듯한 의혹 제기가 있었다. ‘k값’ 논란도 빼놓을 수 없다. 분류기가 분류에 실패한 미분류표 중 두 후보 득표 비율이 1 대 1이어야 하는데 1 대 1.5로 당시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보다 높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추후 모두 전문가들에 의해 사실이 아니거나 ‘부정선거’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과학’으로 포장된 어설픈 근거에 기반한 다큐멘터리 제작도 정해진 수순이다. 2017년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야당 성향의 방송인이 ‘k값’에 근거해 2012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반면 최근에는 김영애 배우가 생전 운영했던 회사의 황토팩 화장품에 중금속이 검출됐다는 보도로 공정성 및 방송윤리 논란을 일으켰던 PD가 2020년 총선 당시 사전투표와 본투표 결과가 많이 다른 것을 두고 부정선거 증거라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모두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음모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워 보인다.음모론은 믿지 않지만 지금까지 선관위의 선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된 검증을 요구받은 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선관위 눈치를 봐야 하는 정치권은 선거관리 시스템 점검을 적극 주장할 처지가 못 된다. 오죽하면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더불어민주당도 선관위 의혹 규명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까. 선거 보도를 하는 입장에서 언론도 선관위에 밉보이는 것은 부담스럽다. 관련 학회들은 선거 때마다 선관위에서 발주하는 연구용역 수주가 명성 유지에 도움이 되니 불편한 문제 제기를 꺼린다. 학자들도 자칫 부정선거 음모론을 증폭시켜 양극화를 조장하거나 선거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할까 조심스럽다. 여론도 ‘대한민국이 설마 그 정도 수준이겠냐’는 ‘국뽕’이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 선관위는 ‘설마’ 했던 그 수준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결원이 없는데도 채용 인원을 배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선관위 전현직 사무총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의 자녀 10여 명이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이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내부 자정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폐쇄적인 조직에서 만약 부실 선거관리가 있었더라도 외부로 알려졌을까 하는 점이다. 무려 3500곳이 넘는 사전투표소 관리가 제대로 될까. 사전투표와 당일 투표로 복잡해진 선거 과정에서 표 집계는 잘될까. 최근 드러난 선관위의 폐쇄적 조직문화로 미루어 볼 때 ‘부정’까지는 몰라도 ‘부실’ 은폐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2022년 대선 당시 여러 선거관리 난맥상이 알려져 대한변협이 “선관위의 허술한 선거 사무관리”를 질책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한변협은 ‘극우 음모론자’가 아니다.
‘공무원의 영혼.’ 필자의 2022년 1월 동아일보 칼럼 제목이었다. 당시 대선 직전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캠프 특보 출신 조해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의 사의를 반려해 단 한 번의 전례도 없었던 연임을 추진하자 중앙선관위 간부급 직원들과 17개 광역지자체 선관위 지도부가 조 상임위원의 퇴임을 관철시킨 것을 칭송한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 신문사는 ‘나중에 선관위 비위라도 나오면 민망할 수 있다’며 원래 제목을 완곡하게 수정했었다. 지금은 당시 신문사의 선견지명이 고맙다.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 여론과 무관하게 자신은 견제와 상호 균형의 대상이 아니라는 선관위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선관위가 자초한 일이다.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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