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세 판을 내리 진 뒤 마침내 1승을 거뒀을 때 바둑계는 환호했다. “아직 인간의 바둑은 살아 있다”고. 지금은 어떤가. 프로 기사들은 AI가 두는 수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다. 장강명 작가의 신간 <먼저 온 미래>는 이런 반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바둑은 AI와 가장 잘 맞는 분야였다. 승부가 숫자로 명확히 갈리고, 모든 수가 데이터로 기록되며, 이기고 지는 것만이 유일한 평가 기준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AI는 인간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e스포츠계도 일찌감치 백기를 들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스타’는 2018년 게임 ‘스타크래프트 2’로 유럽 최고의 프로게이머들을 10전 전승으로 격파했다. 의사, 변호사의 국가 자격 시험? 이제는 AI가 합격선을 훌쩍 넘는다는 게 놀랍지도 않다.
창의성의 영역마저 뚫렸다.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 1위로 화가를 꼽았다. 감성과 상상력은 인간만의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과 6년 후 AI가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미국 콜로라도 미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심사위원들은 그것이 AI 작품인 줄도 몰랐다.
최근 만난 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는 이런 고백도 했다. “예전엔 온종일 고민해서 광고 카피 하나를 뽑았는데 이제는 AI가 던져준 수십 개 문구 중에서 고르는 게 일상이 됐다”고.
‘인간의 무엇’을 꼭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휴먼 프리미엄’을 강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둑에서 AI 활용을 금지하는 대회를 개최한다. ‘좌상귀 변형 소목만 사용’ 등 특정 포석만 허용하는 시나리오 바둑을 둘 수도 있다. 승패 대신 ‘최고의 드라마상’ ‘최고의 모험수상’ 같은 감성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영화제가 흥행 성적이 아니라 예술성으로 작품을 평가하듯 말이다. 인간미를 평가 지표로 도입할 수도 있다. 기록 경쟁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경연장으로 대국을 바꾸는 것이다.
실제 일부 기업은 ‘인간이 직접 만든 것’을 앞세워 차별화에 나섰다. 미국의 수공예품 전문 플랫폼인 엣시는 지난해부터 ‘Keep Commerce Human(상거래는 인간적이어야 한다)’이라는 슬로건으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수제품의 가치가 주목받는 것처럼 ‘인간이 만든’이라는 라벨이 프리미엄이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바둑계는 여전히 승부에만 매달리고 있고, 인간다움을 평가하자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결국 시장이 원하는 것은 수익과 직결된 효율성과 성과이기 때문이다.
AI를 피할 수 없다면 켄타우루스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방법이다.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신화 속 존재처럼 인간과 AI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 개발자들은 AI와 함께 일한다. 반복적인 코딩은 AI가, 창의적인 설계와 검증은 인간이 맡는다. 최근 미국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콤비테이터의 게리 탠 최고경영자(CEO)는 “이제 10명의 개발자가 100명 몫의 작업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알파폴드’는 과학자의 신약 개발과 질병 연구를 돕고 있다. 알파폴드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지난해 노벨화학상까지 받았다. 인간의 직관과 AI의 계산 능력이 결합할 때 놀라운 시너지가 나타난다.
이런 업무 방식이 진정한 협업인지, AI에 종속되는 것인지는 논란거리다. 현재 바둑계를 보면 후자에 가깝다. ‘인간의 바둑’을 찾는 대신 AI를 모방하는 길을 택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사들의 실력은 이제 ‘AI와의 일치율’로 평가받는다. 다른 분야에서도 인간은 AI의 단순 보조자 또는 추종자로 지위가 떨어질 수 있다.
아직 AI가 침범하지 못한 영역을 찾는 건 가능하긴 하다. AI는 바둑을 둘 때 인간을 항상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왜 바둑을 두고 승리가 중요한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AI는 하루에 수십만 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이 사람마다 왜 다른 위로와 감동을 주는지는 알지 못한다. ‘의미 부여’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지난 5월 영국심리학회는 “AI는 진정한 인간의 공감을 복제할 수 없다. 의미 있는 상호작용이 아닌 연결의 환상을 만들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AI가 아무리 정확한 답을 줘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잡고 싶어 한다. 이것도 데이터로 해결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