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빅텐트'만 치면 된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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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빅텐트'만 치면 된다는 착각

“그래도 쟤는 꼭 막아야 해.”

1999년 개봉한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일렉션>에 나오는 대사다. 능력은 있지만 인성으로는 구설수가 있는 주인공 트레이시가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생기는 교내 암투를 그린 극이다. 강한 야욕을 드러내는 트레이시의 단독 출마가 불편했던 교사 짐은 다른 학생(폴)의 참여를 종용한다. 마지막에 추가 후보로 뛰어든 타미는 ‘학생회장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 사람(트레이시)만 아니면 된다’는 메시지로 연설한다.

[토요칼럼] '빅텐트'만 치면 된다는 착각

20여 년 전 영화지만 기시감이 드는 건 한국 정치판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최대 화두도 ‘반(反)이재명 빅텐트’다. 이재명 후보 외 나머지 후보가 힘을 합쳐 1 대 1 구도로 승기를 잡자는 단순한 전략이다. 후보들이 내놓는 발언도 ‘이재명’ 일색이다. 지난 17일 국민의힘 미디어데이에서 김문수 후보는 “이재명을 막기 위해 나왔다”고 운을 뗐고, 홍준표 후보 역시 “이번 대선은 홍준표 정권이냐, 이재명 정권이냐의 선택이다”고 했다. 대선 출마 선언조차 하지 않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단일화부터 진보 진영과 제3지대를 총망라한 ‘그랜드 텐트’를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나머지 후보 지지율을 모두 모아도 이재명 후보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절박함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누구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선거 전략 말미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2016년 미국에서 벌어진 ‘네버 트럼프(Never Trump·절대 트럼프는 안 된다)’ 운동이 대표적이다. 공화당 내 전·현직 인사들마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 조 바이든을 지지했다. 초당적 연대는 트럼프를 당장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바로 깨졌다. 함께하는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더욱 거세진 ‘네버 트럼프’ 바람에도 트럼프는 큰 표 차로 승리하며 귀환했다. ‘반(反)’을 기치로 건 연대의 힘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한국도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대 대선에서 보수는 ‘문재인 시즌 2만은 막자’며 정치 경험이 없는 검사 출신을 다급히 모셔 왔다. 그렇게 정권 창출에는 겨우 성공했으나 그 끝은 어땠나. 모두가 알다시피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일으켜 집권 3년 차에 파면됐고, 그 과정에서 보수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공중분해됐다.

그런데도 너도나도 ‘반명’만 외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60일 내에 치러지는 초단기 대선에서 가장 빠르게 이목을 집중시키기 좋은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한 보수 진영 관계자는 “기간이 짧은 선거에서는 무조건 언론 노출이 많이 되는 게 유리하다”며 “가장 유력한 주자를 비판하는 게 제일 쉬운 선거 전략인 셈”이라고 했다. 이런 전략의 맹점은 반대하려는 상대의 체급도 함께 키워준다는 점이다. 물리학에 비유하자면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다. 한 방향의 힘이 강해지면, 그에 반하는 에너지도 자라난다.

보수 주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막판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전략을 썼지만,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가 다시 등판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선 그를 이유로 ‘한동훈 때리기’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한 후보는 6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 대표에 당선됐다. 당시 국민의힘의 한 의원은 “국민들은 ‘위기-극복’으로 이어지는 영웅의 서사를 정치인에게서 보고 싶어 한다”며 “집중 포격을 받는 그림이 오히려 스토리를 완성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보수 진영은 낡은 카드를 또다시 꺼내들었다. 그 덕에 다자 구도의 경선으로 ‘컨벤션 효과’가 극대화될 시기에, 주요 뉴스의 헤드라인은 오히려 ‘이재명’으로 장식되고 있다.

<일렉션>에서도 트레이시는 결국 학생회장에 당선된다. 폴은 인기는 있었지만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고, 타미는 자신이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유권자는 결국 ‘왜 그 사람인가’를 묻는다. 적을 위해 손을 잡는 건 쉽지만, 적이 사라진 후에도 남을 비전 없이는 연대도 신기루에 불과하다. 조기 대선이 50여 일도 남지 않았는데 ‘빅텐트’만 뻐꾸기처럼 외치는 보수 진영 정치인들을 보면 묻고 싶어진다. 언제까지 ‘텐트’로 연명할 수 있느냐고, 왜 오래 살 집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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