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대통령의 과학기술 선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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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대통령의 과학기술 선구안

현존하는 컴퓨터의 한계를 돌파하려면 ‘폰 노이만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과학계에서 회자된다. 폰 노이만 구조는 중앙처리장치(CPU)가 별도 공간에 있는 메모리반도체 데이터를 갖고 와 연산하는 범용 컴퓨터 설계 기법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꼽히는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1903~1957)이 처음 고안했다. CPU가 메모리를 읽는다는 것은 지금은 당연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폰 노이만이 등장하기 전까진 이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컴퓨터 과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폰 노이만이 인류사에 획을 그은 또 다른 장면이 있다. 그는 원자폭탄이 공중에서 폭발하면 지상에서 터질 때보다 살상 반경이 커진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폭탄 ‘리틀보이’와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을 언제 어떤 고도에서 떨어뜨리면 살상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지 정확히 계산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를 그대로 실행했다. 이에 고무된 폰 노이만은 핵폭탄의 제왕으로 불리는 수소폭탄 개발에 몰두했다. 그러다 방사선 피폭 과다로 사망했다. 인류 최초의 거대 과학 사업으로 불리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뒷이야기 중 하나다.

역사의 굵직한 페이지 뒤에는 늘 과학자들이 있다. 현시대에도 마찬가지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동아줄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가 생산하지만 기술은 KAIST에 의존하고 있다.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주상복합 건물에 비유하면 D램을 쌓은 HBM은 주거층에 해당한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상가층이다. 인터포저는 지반, 입출력 단자(I/O)는 각종 전기 배선이다. HBM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층수가 높아지며 I/O 구조가 복잡해진다. 이때 인터포저 설계와 적층 등 패키징 최적화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 KAIST 차기 총장 후보 세 명 중 하나인 ‘HBM의 아버지’ 김정호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와 제자들이 이들 기술 개발을 책임지고 있다. 폰 노이만 구조 극복의 실마리도 여기에 숨어 있다고 한다.

[토요칼럼] 대통령의 과학기술 선구안

과학은 기술과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는 그 열매를 먹고 성장한다. 이를 정확히 간파한 지도자는 KAIST를 설립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21세기 들어선 노무현 대통령이 꼽힌다. 스스로 특허와 실용신안을 낼 정도로 과학에 조예가 깊었던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 담당 부처를 부총리급으로 처음 격상시켰다.

과학이 중요하다는 총론까지는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급 정치인이 대부분 수긍한다. 문제는 그다음 각론이다.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을 외친 윤석열 정부도 총론에선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각론이 부실했다. 우주항공청을 경남 사천의 한 구석에 둔 것이 대표적이다. 방위산업과 한 몸인 우주 기술 개발을 위해 국내외 군(軍) 관계자들이 한국 우주청에 방문할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극도로 열악한 교통편, 나대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주변 환경 때문이다. 미래 우주 방산 경쟁력은 AI와 양자(퀀텀) 기술, 데이터 사이언스에서 성패가 갈린다. 고급 인재 유치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입지를 더 고민했어야 했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의대 증원을 동시에 추진한 것도 패착이었다.

이달 초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서도 아직 과학기술 각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AI에 100조원 투자를 약속했지만 이를 실현할 AI 미래기획수석 임명은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다른 부처와 달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하마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과학 두뇌의 집결지 KAIST 차기 총장 선임 절차도 멈춘 지 오래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일 취임식에서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에 따라 쓰겠다”고 밝혔다. 신기술이 매일매일 폭발하는 이 시대 가장 필요한 박정희 정책은 과학기술 선구안이다. 폰 노이만 같은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번뜩이는 두뇌를 가진 젊은 과학자가 국내외에 많다. 미분방정식으로 난치병 치료 단서를 찾는 수리생물학을 개척한 김재경 KAIST 교수, 고체 속 전자의 양자 거리를 처음 측정한 양범정 서울대 교수 등이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각종 한림원, 특정 협회 등 이익단체의 상투적 의견이 아니라 현장의 젊은 과학자 개개인의 혜안을 이 대통령이 직접 듣고 살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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