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를 배달하던 기사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는지 금세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스팔트 위 엉망으로 흩어진 피자 상자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피자…변상해야 할 텐데.” 무심코 나온 첫마디에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 T예요? 아무리 그래도 넘어진 사람부터 걱정해야죠.”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사람을 재단하는 잣대가 돼버린 MBTI.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F(Feeling·감성형)와 T(Thinking·이성형)의 대비다. 누군가 “회사에서 혼났어”라고 말했을 때 F 유형은 “괜찮아? 누가 그랬어?”라며 먼저 마음을 다독인다. 반면 T 유형은 “왜? 뭘 잘못했어?”라고 이유를 묻는다. 원인을 찾아 갈 길을 제시해주는 건 T 나름의 애정 표현이다. 그러나 별것 아닌 일에도 칭찬을 건네는 챗GPT 화법을 ‘어화둥둥체’라고 부르며 위로받길 원하는 시대다. 온기가 필요한 F에게 T는 공감 능력 없는 냉혈한처럼 보인다.
MBTI를 정치에 대입하면 진보는 F, 보수는 T의 언어를 주로 쓴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 ‘약자가 당당한 세상’ 같은 말은 대체로 진보의 슬로건이다. 연대, 포용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 정치인은 자연스레 감성을 자극한다. 반면 법과 제도, 전통과 규범에 더 무게를 두는 보수는 이성의 언어를 앞세운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경선 4강에 든 김문수·안철수·한동훈·홍준표 후보 모두 자신을 T 유형이라고 소개한 건 우연이 아니다. 보수에게 시스템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냉정한 사고의 영역이다.
그러나 정치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T보다 F가 유리하다. 지난 18일 대선 후보 TV 토론 첫머리발언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과거는 미래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한강 작가의 문장을 인용했다. 또 “1980년 5월 광주는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을 구했다. 오늘의 이 내란을 극복하는 우리의 노력도 결국 다음 미래 세대를 구하게 될 것”이라는 감성의 언어를 내세웠다. 토론 시간 대부분을 방어적으로 대응했고 경제 정책의 디테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19~21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응답자의 42%가 이 후보를 ‘가장 토론을 잘하는 후보’로 꼽았다.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 기업하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야 한다”는 메시지부터 낸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잘했다는 응답은 19%에 그쳤다. 양자의 지지율 차이가 반영됐다 하더라도 큰 격차다.
돌이켜보면 보수가 더 감성적·직관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대체로 약자이던 때다. 고(故) 김영삼 대통령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군사 독재 종식을 이끌어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한 문장으로 분노한 민심을 결집했다. 그러나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 계엄 이후 형성된 ‘내란 프레임’ 속에서 보수는 언어 경쟁에서 뒤처진 지 오래다. 게다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후보가 ‘어려운 서민을 위해’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할 때 국민의힘은 ‘포퓰리즘은 나라를 망친다’ ‘나라 곳간을 생각해야 한다’는 식의 말로만 대응했다. 옳은 얘기다. 하지만 당장 하루하루가 버거운 서민에게는 야박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피자값은 어쩌냐”고 묻는 쪽보다 “괜찮냐”고 우선 손부터 내미는 쪽에 당장 더 끌리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T들은 말한다. 감성은 잠시 위안을 줄 뿐 가야 할 길은 이성이 안내한다고. 그럼에도 지금 보수에 필요한 건 뾰족한 논리에 공감이라는 감성을 더한 융합적 감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체 없는 말로 선동하거나 선심성 공약으로 유권자를 현혹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보수는 국가를 ‘엄격한 아버지’의 가족 모델로 보고, 진보는 ‘자상한 부모’의 모델로 본다”(조지 레이코프)는 말이 있다. 엄한 아버지가 자식의 마음을 사는 건 당연히 힘들다. 그만큼 더 세밀하고 친절하고 정교하게 설득해야 한다.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재정 건정성을 지켜야 한다’는 딱딱한 표현 대신 ‘우리 아이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조금 더 희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F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너 T야?”라는 말이 핀잔으로 쓰이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