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30년 퇴사 안한 첫 직장…인디의 힘은 실패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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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교 동창들 '삐삐'로 오디션 응시…이들 30주년이 곧 인디 역사

"즐겁게 노는 게 반항이자 낭만…동네 친구·나무 같은 밴드 됐으면"

이미지 확대 어느덧 30년 달려온 크라잉넛

어느덧 30년 달려온 크라잉넛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밴드 크라잉넛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크라잉넛 합주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5.12 ryousanta@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5년 어느 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교 새내기 4명이 서울 홍대 클럽 '드럭' 오디션장에 나타났다.

초·중·고교를 내리 함께 다닌 이들 네 명은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클럽 사장의 무선호출기(삐삐) 연락에 한달음에 달려간 참이었다.

초고속 인터넷도 인터넷 TV(IPTV)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도 없던 1990년대 초반, 시험을 마치고 연주실에서 합(合)을 맞추는 것이 가장 큰 '놀이'였다는 네 청년은 이렇게 무대에 올랐다.

'한국 인디 1세대'로 불리는 밴드 크라잉넛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분출하는 청춘의 거대한 에너지를 '말달리자'라는 네 글자에 응축해 큰 반향을 일으킨 동명 곡부터 '룩셈부르크', '명동콜링', '좋지 아니한가', '밤이 깊었네' 등 록 음악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굵직한 히트곡들을 남기며 한국 대중음악계에 또렷한 족적을 남겼다.

2집(1999) 때 키보드·아코디언 등을 맡은 김인수가 합류한 것 말고는 박윤식(보컬), 한경록(베이스), 이상면(기타), 이상혁(드럼) 등 멤버 변화 없이 30년을 함께 달려왔다.

최근 서울 마포구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크라잉넛은 "친구끼리 놀이터나 오락실에서 놀듯 기타 치고 놀다가 30년을 활동하게 됐다"며 "한 번도 퇴사하지 않고 한 번도 쉬어본 적 없는 첫 직장이 여기"라고 뜻깊은 해를 맞은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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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0년 달려온 크라잉넛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밴드 크라잉넛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크라잉넛 합주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5.12 ryousanta@yna.co.kr

한경록은 "지난 30년을 돌이켜 보면 낭만이 있었다"며 "20대 초반에는 반항기도 있었지만, 여기에도 낭만이 서려 있더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톱니바퀴처럼 열심히 살고 있느냐. 이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 즐겁게 노는 게 곧 반항이고 낭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라잉넛이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28일 발표한 신곡 '허름한 술집'도 이러한 정서와 맥이 닿아 있다. 멤버들은 누구나 잠시 쉬어갈 친근한 술집 같은 팀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흥겹게 그려냈다.

이상혁은 "우리가 '허름한 술집'이 아니라 고층에서 마티니를 마시는 '고급 바'를 지향했다면 장르도 시티 팝을 했겠지만, 우리 음악은 그렇지 않다"며 "신곡 발매일에 홍대 '제비다방'에서 공연했는데, 다들 흥겹게 노래하며 술을 마셔서 마지막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웃음 지었다.

한경록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는 친구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우리 음악이 힘든 하루를 끝내고 퇴근하며 듣는 보상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크라잉넛은 동네 친구 같은 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상면은 "우리는 '위대한 밴드가 될 거야'라는 식의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며 "그저 음악이 너무 좋아서 멤버끼리 몰려다니던 것이 여기까지 왔다"고 말을 보탰다.

크라잉넛 소속사 사무실에는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등 시대를 가로지르는 당시의 공연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옛 포스터 속 반항기 가득한 앳된 얼굴이던 시절의 크라잉넛은 어땠을까.

한경록은 "그때는 설익은 과일 같은 시큼함이 있었다"며 "음질도 조악하고 연주는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억압에서 갓 풀려난 듯한 생명력과 낭만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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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0년 달려온 크라잉넛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밴드 크라잉넛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크라잉넛 합주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5.12 ryousanta@yna.co.kr

멤버들은 팀의 30년을 가로지르는 키워드로 '청개구리 심보'를 꼽았다. 시류와 유행에 괜스레 역행하고 싶은 장난기 어린 반항기는 이들의 멜로디와 노랫말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상면은 "과거에는 거대 담론에 관해 분노를 표출했다면, 나이를 먹은 지금은 일상 속 작은 부분에 대해 틀리면 틀렸다는 식으로 솔직하고 자잘하게 표현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달려온 크라잉넛의 시간은 곧 한국 인디 음악 30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을 뒤따라 노브레인, 델리 스파이스, 레이지본 등 1990∼2000년대 인디 밴드가 잇따라 등장해 사랑받았고, 홍대 클럽 문화도 꽃을 피웠다.

박윤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인디 앨범을 낸 펑크 밴드가 맞다"고 뿌듯해했다. 이상면도 "펑크 음악이 사실 1970∼1980년대 들어왔어야 했는데, 당시 검열 등으로 음악이 잘 도입되지 않았다. 펑크 음악을 대중에 소개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돌아봤다.

크라잉넛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2년 한일 월드컵, 홍대 인근 상권 젠트리피케이션, 코로나19 대유행 등을 거치며 홍대 클럽의 성쇠를 목도했고, 틈나는 대로 해당 지역에 힘을 실어주고자 노력했다.

한경록은 "예전에는 '우리 같은 싸구려 클럽 밴드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지금도 홍대 클럽 라이브 문화에 대한 애착이 있다"며 "새로 음악을 시작하는 후배 뮤지션을 보면 좋은 기회를 주고 싶고, 밥이라도 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1990년대에는 라이브 클럽 합법화를 위한 목소리를 냈고, 한경록은 매년 자기 생일을 맞아 홍대 인디 음악계를 대표하는 축제 '경록절'을 열고 있다.

이상혁은 "요즘 친구들도 음악을 시작할 때 기타를 메고 홍대로 온다"며 "우리가 했던 홍대 음악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게 대단하고 고맙다. 처음 음악을 시작한 클럽 '드럭' 자리엔 지금 다른 클럽이 들어와서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온다. 젊은 친구들이 밴드를 만들어 무대에 올라가는 걸 보는 게 즐겁고 고맙다"고 했다.

최근 대중음악계에 모처럼 '밴드 음악 붐'이 일면서 뮤지션 꿈나무들의 오디션 지원도 부쩍 늘어났다. 한경록이 최근 심사에 참여한 어느 밴드 오디션에는 350팀이 지원해 자체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

한경록은 "밴드 음악 저변이 넓어진 것은 맞는 것 같다. 합주실을 운영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대학생이나 직장인 동호회 밴드가 많아져 운영이 잘 된다고 한다"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밴드가 성공할 확률도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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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밴드 크라잉넛이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크라잉넛 합주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5.12 ryousanta@yna.co.kr

이상면은 "단순히 피카소를 따라 한다고 해서 훌륭한 미술 작가로 인정받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밴드나 음악도 유행을 따르는 비슷한 음악보다 독특하게 들리는 음악이 많이 나와야 한다. 어느 한 장르로 확 쏠렸다가 금방 식는 걸 종종 봤다"고 말했다.

인디 음악은 '인디펜던트'(Independant·독립)라는 단어 그 자체처럼 유행에 따르려는 기업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고 음악인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이상면은 "인디의 힘은 곧 '실패할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인수는 "감정을 다각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했고, 박윤식은 "거친 듯해도 다른 곳에선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라고 표현했다.

크라잉넛은 올해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1990년대 홍대에서 1인당 3천원을 받고 공연하던 시절의 열정을 팬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지역과 연계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동네 어귀를 지나다 보이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도 만나면 반가운 커다란 나무 같은 밴드가 되면 좋겠습니다."(한경록)

tsl@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5월12일 13시4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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