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삶의 크기·깊이·높이·앞뒤
이것은 혹시 작은 삶은 아닌가. 담대한 시도를 통해 불후의 영웅이 되기보다는 무병장수의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 삶은 너무 작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혹시 얇은 삶은 아닌가. 당대의 상상력을 벗어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삶은 너무 얇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혹시 얕은 삶은 아닌가. 삶의 심해를 탐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삶은 너무 얕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혹시 짧은 삶은 아닌가. 오래 인내하기보다는 당장의 자극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이 삶은 너무 짧은 호흡의 삶일지도 모른다.
심아빈의 골프 코스는 예상보다 깊다. 골프공이 들어가는 구멍인 홀은 입체감 있게 묘사돼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작가가 실제로 캔버스에 구멍을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은 그려진 구멍인 동시에 실제 구멍이다. 인생에는 빠지면 정녕 헤어 나오기 어려운 구멍이 가득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의 인생관을 집약하는 것은 무엇보다 ‘18홀’이다. 골프 코스에서 18홀은 단순히 마지막 홀이 아니라 가장 난도가 높은 코스라고 한다. 18홀에는 장애물이 많으니 승부가 뒤바뀌기 쉽고, 마지막 코스이니 실수를 회복하기도 어렵고, 어렵다 보니 긴장도가 높고, 긴장도가 높다 보니 의외의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이 18홀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크기에 대한 고찰’, ‘깊이에 대한 고찰’, ‘높이에 대한 고찰’ 연작이 이 질문에 답한다. 이 시대의 삶이 너무 작아 보이면, 위대한 삶을 살아보자고 선동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삶이 너무 얇아 보이면, 두터운 삶을 살아보자고 권면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삶이 너무 얕아 보이면, 고매한 삶을 살아보자고 촉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야망을 부추기려는 졸업식 축사나 윤리를 가르치려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나 영혼을 위로하려는 종교 지도자의 설교에나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 대신 심아빈의 작품들은 (삶과 세계의) 크기, 깊이, 높이에 대해 다시 묻는다.
‘높이에 대한 고찰’을 구성하는 두 그림을 보라. 왼쪽 캔버스는 높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낮다. 오른쪽 캔버스는 낮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높다. 그러니 우리는 그중 어느 것이 더 높은지 확언할 수 없다. ‘크기에 대한 고찰’의 두 그림을 보라. 왼쪽 캔버스는 크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작다. 오른쪽 캔버스는 작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크다. 그러니 우리는 그중 어느 것이 더 큰지 자신할 수 없다. ‘깊이에 대한 고찰’을 이루는 두 그림을 보라. 왼쪽 캔버스는 얇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두텁다. 오른쪽 캔버스는 깊고 두텁지만 그 캔버스에 그려진 물체는 얇다. 그러니 우리는 그중 어느 것이 더 깊고 두터운지 결정할 수 없다. 어디 크기, 깊이, 높이뿐이랴. 전시의 마지막 작품 ‘앞을 향해 뒤를 보여주는 캔버스’는 앞과 뒤마저 고찰한다. 캔버스의 뒷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작품의 앞을 보고 있는 것일까, 뒤를 보고 있는 것일까. 무언가의 뒷모습을 보고 있지만, 그것은 작품의 앞면이기도 하다.선동가의 꿈은 당신을 동원하는 것이고, 출마자의 꿈은 당신의 표를 얻는 것이다. 창업자의 꿈은 당신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며 사기꾼의 꿈은 당신을 갈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다르다. 예술가의 꿈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심아빈은 관객에게 특정한 삶을 제시하는 대신, 삶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앞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그의 그림들 중 어느 것이 크고, 깊고, 높다고 판정하려면 크기와 깊이와 높이를 관객 스스로 다시 정의할 수밖에 없다.그렇게 재정의하는 행위를 통해 다름 아닌 관객 자신이 달라진다. 전시장에 들어설 때 그는 대상의 크기, 깊이, 높이, 앞뒤를 당연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전시장을 나올 때 그는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앞뒤를 정의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이제 그는 집에 돌아가 쇼츠를 보면서 물을지도 모른다. 이 쇼츠는 과연 짧은가. 짧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과정에서 그는 삶의 길이와 깊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자기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상상하게 되며, 결국에는 자기 삶의 스타일을 발명하게 될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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