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성장하면 벌 받는 나라에서 '글로벌 챔피언'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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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성장하면 벌 받는 나라에서 '글로벌 챔피언' 나올까

“어느 중소기업도 중견기업이 되길 바라지 않는 나라.”

최근 본지가 연재한 ‘망가진 기업 성장사다리’ 시리즈를 취재하며 다양한 중소·중견기업인을 만났다. 이들의 공통된 하소연은 “한국에선 성장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었다.

전시산업을 개척해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S사는 중소기업적합업종 규제로 공공 발주 사업에서 배제되며 주력 사업을 접을 위기에 몰렸다. 전자부품 분야 B사는 중국 제조 업체의 저가 공세 속에 생존을 위해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렸지만 ‘선행 개발’이 아닌 ‘양산 개발’이란 이유로 지원 사업에서 탈락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K사는 정부의 ‘히든 챔피언’ 육성 사업에 선정되고도 기업 신용등급이 한 등급 모자라 가장 중요한 혜택인 저금리 자금 융자를 못 받았다. 반대로 한 보안 업체는 글로벌 인공지능(AI) 보안 시장에 진출하려 정책 자금을 신청했지만 “신용등급이 너무 높다”며 탈락했다. 제도는 있지만 정작 “성장하고 싶다”는 기업은 배제되는 역설적인 일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의 성장사다리 정책에서 ‘창조적 파괴’가 실종된 결과다. 2011년 이명박 정부는 기업이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성장을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극복하고, 글로벌 챔피언 기업을 육성한다며 ‘중견기업’ 개념을 도입했다. 이후 각 정부는 세제 혜택, 저리 자금, 전용 R&D 프로그램 등 지원을 늘려왔다.

하지만 어느 정부도 경쟁력을 잃은 기업을 퇴출시키고, 그 자리를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로 무장한 기업이 채우도록 하는 창조적 파괴에 나서지 않았다.

파괴가 없으니 정부가 보호해야 할 ‘약자’만 늘어났다. 예산 등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도와주지 않으면 망할 기업은 늘어나니 글로벌 챔피언을 노리는 기업엔 지원이 안 가고 뿌려주기식 지원만 반복됐다. 벤처투자와 중소기업 R&D는 성장 정책이라기보다 복지·일자리 정책이란 회의적 시각이 팽배한 이유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총연구개발비는 2012년 5조8645억원에서 2022년 9조4227억원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기업당 개발비는 4억2000만원에서 2억7000만원으로, 평균 연구 인력은 5.1명에서 3.3명으로 각각 감소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좀비기업’의 비중은 2017년 32.3%에서 지난해 40.9%로 늘었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 모토는 ‘진짜 성장’이다. 지금까지의 ‘약자 양산’ 정책을 반복해선 저성장 늪을 탈출하기 어렵다. 진짜로 성장하고자 하는 기업을 조금이라도 더 도와달라는 기업인들의 호소를 외면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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