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월드투어를 하는 록스타 같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달 중동과 대만을 찾은 데 이어 9일(현지시간) 영국을 방문했다.
11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 벨기에 등 유럽 각국 정상을 만날 계획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강조하는 게 있다. 바로 소버린 AI(인공지능)다. 그는 “모든 국가는 AI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거창한 말과 함께 각국이 자신의 역사와 언어, 문화를 담은 AI 모델을 개발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글로벌 시가총액 1~2위를 오가는 기업의 CEO가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을 것이다. 황 CEO가 소버린 AI를 주창하는 배경에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를 다변화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간 빅테크에 판매하던 첨단 GPU를 민족주의적 열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각국 정부에도 팔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반도체 시장의 큰손은 각국 정부다.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는 엔비디아의 GB300 블랙웰 칩 1만8000개를 구입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이날 “영국 컴퓨팅 성능을 20배로 늘리기 위해 10억파운드(약 1조8000억원)를 추가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벤처캐피털(VC)인 에어스트리트캐피털의 네이선 베나이히 창업자는 이 같은 소버린 AI 열풍을 “정치적 브랜딩이며 디지털 식민주의”라고 꼬집었다. AI 학습에 필요한 반도체와 데이터 라벨링 기술 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소버린 AI를 추진하면 해외 기업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소버린 AI의 역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소버린 AI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들어 소버린 AI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소버린 AI가 곧 ‘AI 모델’이라는 좁은 정의를 기반으로 논의가 진행되면서 엔비디아 GPU에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지난 3월부터 RISC-V 기반 고성능 GPU를 자체 개발하겠다는 유럽연합(EU)과 대조를 이룬다.
최근 만난 한 테크기업 임원은 최근의 한국형 소버린 AI 논의에 대해 “기업가적 냉철함이 부족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한국형 AI 모델의 필요성에 매몰된 나머지 세계적인 소버린 AI 열풍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가 실종됐다는 지적이다. 한국에도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를 비롯해 전압기, 전선 등 풍부한 데이터센터 인프라 산업이 있다. 한국 기업들도 황 CEO처럼 활짝 열린 소버린 AI 시장을 기회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