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후 세계 질서를 결정한 이벤트는 1945년 2월 크림반도 남부 휴양도시 얄타에서의 3국 정상회담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모였다. 그 유명한 사진 속에는 루스벨트가 가운데에, 처칠과 스탈린이 좌우에 앉았다.
그 구도를 현대로 이어보면 정중앙은 미국 대통령, 처칠 자리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한·일·호주 등 미 동맹 정상들이 같이 앉는 긴 벤치, 스탈린 자리는 푸틴과 시진핑, 김정은, 그리고 이란 등 권위주의 국가 정상들이 함께 앉는 짧은 벤치로 구성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좌석 배치에 변화가 생겼다. 얄타 회담 80주년을 맞아 지난달 얄타의 한 갤러리에 전시된 ‘얄타 2.0’이라는 미술 작품에선 푸틴을 정중앙에, 트럼프와 시진핑을 각각 그 옆자리에 앉혔다.
이 작품에서 트럼프는 자유 진영의 대변자로 비치지 않는다. 푸틴, 시진핑과 다를 바 없는 권위주의적 인물이자, 오히려 그들보다 더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린란드와 가자지구,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미국이 보인 모습을 두고 누가 미국을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생각하겠는가. 트럼프는 “적보다 친구가 더 나쁘다”며 동맹국에 더 가혹하게 관세 폭격을 퍼붓는다. 반면 북·중·러·이란 등 ‘악의 축’은 제 편만은 확실하게 챙긴다.
미국이 인심을 잃는 통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힘의 공백이다. 그 틈을 비집고 균열을 더 넓히려는 게 중국이다. 시진핑은 얼마 전 중국발전포럼에 참석한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났다. 지난해 20여 명에서 올해는 40여 명으로 늘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벤츠 BMW HSBC 이케아 아람코 등의 세계적 기업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트럼프에게 “이들이 내 편일 수 있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기업인들은 ‘공포’ 분위기로 최대한 쥐어 짜내려는 트럼프의 조폭식 접근이 두렵다. 그렇다고 “중국은 안전한 투자처”라는 시진핑의 말도 미덥지 않다. 이 대혼돈의 시간, 지구전에 들어갈 채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윤성민 수석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