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 세계바둑대회가 끝나고 열린 뒤풀이 자리에서 우승자인 중국 창하오 9단은 패자인 이창호 9단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복기를 청한다. 바둑 팬 사이에서 아직 회자하는 유명한 장면이다. 독설로 이름을 떨친 마샤오춘 9단도 이 9단에게는 예의를 갖췄다. 무려 열한 살 어린 이 9단의 술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았을 정도다.
실력만 뛰어나서는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신산(神算)’으로 불린 이 9단은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기사다. 그런데도 항상 동료 기사들에 대한 배려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상대방이 실수했다” “운이 좋았다”는 과묵한 그의 단골 승리 소감이었다.
이 9단과 그의 스승 조훈현 9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승부’가 26일 개봉했다. 제자와 스승이 최고의 자리를 놓고 벌인 인간적 드라마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문제는 배우 유아인 씨가 이 9단 역을 맡았다는 것이다. 연기력과 별개로, 유씨는 의료용 프로포폴 등 마약류 상습 투약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지난달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애초 이 영화는 넷플릭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23년 2월 경찰이 유씨를 조사하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사회적 파장이 고려됐다는 후문이다. 결국 배급사 교체 후 극장 상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다른 배우와 스태프가 공들인 작품을 통째로 사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재판받고 있는 마약사범이 실존 인물, 그것도 전 세계 바둑 팬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 9단을 연기한 영화 상영은 이해하기 힘들다.
국내 마약범죄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마약사범은 2만3000명으로 3년 전 대비 40% 급증했고, 이 중 63%가 10~30대였다. 유씨가 면죄부를 받은 마냥 버젓이 영화에 나온 것을 보면서 마약에 대한 청소년의 경계심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 대중이 공유하는 문화 콘텐츠는 최소한의 상식과 윤리를 갖춰야 한다. 이 영화는 그 기준에 미달한다.
서욱진 논설위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