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군대는 중앙, 좌익, 우익의 삼군(三軍)으로 구성됐다. 통상 우익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좌익에 약한 동맹국의 원군을 둬, 어느 쪽이 상대방의 좌익을 먼저 깨느냐에 전투의 승패가 갈리곤 했다. 강점과 약점을 서로 잘 아는 군대끼리의 충돌에선 ‘전열’을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가 중요했다. ‘열심히 싸우자’는 개인적 각오가 아니라 조직적인 전열 정비가 강조됐다. 춘추전국시대 <오자병법>도 ‘죽기를 무릅쓰면 산다(必死則生)’는 비장한 지침으로 장병들에게 끝까지 전열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모든 분야에서 (삼성의)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다”며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임직원에게 주문했다. 현재 삼성의 처지를 두고는 “죽느냐, 사느냐는 생존 문제에 직면했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다. 이 회장이 ‘위기’를 직접 거론하며 대대적인 쇄신 의지를 밝히자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란 반응까지 나온다.
과거 삼성전자는 반도체, 휴대폰, 가전이 ‘삼군’을 이뤄 서로 돕는 이상적인 체제를 구축했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은 전 사업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늘 선두에 섰던 ‘주력’ 반도체 사업은 예봉이 꺾였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선 ‘복병’ SK하이닉스의 기습에 휘청이고 있고,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선 대만 TSMC의 ‘아성’을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고 있다. 범용 D램에서는 YMTC 등 중국 업체의 추격이 거세다.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온 휴대폰 사업도 애플과 샤오미, 오포 등의 협공에 시달리고 있다. 가전은 ‘약체’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미래 성장은커녕 생존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
오늘날 삼성의 위기는 장기간의 리더십 공백이 초래한 측면도 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전방위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면서 삼성전자의 ‘전열’에는 계속해서 틈이 벌어졌다. 늦게나마 그런 허점을 틀어막을 반격의 출발점으로 ‘존망지추(存亡之秋)’의 위기론이 제시됐다. 이제 병법서가 제안하는 대로 전열을 가다듬은 삼성이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지 주목된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