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에겐 지워지지 않는 오해가 있다. 바로 ‘라면 소녀’다. 당시 그의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삼계탕 같은 걸 엄청 먹었다”며 웃었다.
다만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타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저린 것처럼 됐다”고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도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운동화를 벗었지만 이후 삶도 순탄하진 않았다. 결혼 후 세 아이의 엄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 수입차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은 이후에 나타났다. 완치되긴 했지만 몇 해 전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고, 작년에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다. 그가 다시 돌아온 곳은 체육계였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일하던 그는 작년부터는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최근 그는 쳐다보기도 싫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한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요즘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앞만 보며 달려왔다. 최근 들어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그는 요리를 배우고, 옷을 고쳐 입는 등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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