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있었다. ‘서민들’이 인식하는 스토리는 이렇다. 연산군 폭정에 대한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새 임금에 오른다. 반정공신들의 전횡과 부패가 누적되고, 조광조가 리더인 정통 성리학 신진 사림(士林)이 부상한다. 반정공신 포함 훈구세력은 ‘조광조 사림’이 위훈삭제(僞勳削除) 등 개혁을 추진하자 기묘사화를 일으키는데,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 방아쇠가 된다. 몰래 궁궐 나뭇잎에 꿀물로 ‘走肖爲王’이라고 쓰니 벌레들이 그 글자들을 따라 나뭇잎을 갉아먹었고 그걸 중종에게 보여줬다는 것. ‘走肖’는 ‘趙’(조)의 파자(破字)로서 ‘조위왕(趙爲王)’, 곧 ‘조씨 성을 가진 자(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 여기에, 사림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선(善), 훈구는 절대악이라는 대립구도가 얹혀진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관한 학문적 견해는 이미 다양하다. 선과 악만으로는 규정이 어려운 훈구와 사림의 관계, 사림의 훈구와 다르지 않은 출신성분(예컨대 조광조는 건국공신 집안 한양 토박이다. 가난한 지방선비가 아니었다.), 관료특채인 현량과(賢良科)를 신설하고 주도한 사림의 당파적 내로남불과 급진성, 중종 개인의 심리상태 등등. 하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오직’ 주초위왕, 벌레들이 작문하며 갉아먹었다는 그 나뭇잎에 관해서다. 어릴 적 이 야사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게 정말 가능한가?’ 의심이 들었더랬다. 아니나 다를까, 과거 공영방송 역사다큐에서 치밀하고 폭넓게 실험을 해본 결과, 어떤 경우에도 벌레들이 사람의 의도대로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글씨를 쓰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럼 훈구세력이 그렇게 벌레먹은 것처럼 나뭇잎에 구멍을 낸 건가?
어쨌거나, 훈구파의 이런 조작과 모함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것은, 가뭄이 들면 왕의 부덕(不德)을 탓하는 시대여서다. 서구 중세 마녀사냥 과정과 비슷하다. 한술 더 떠, 이게 야사(野史) 정도가 아니라 버젓이 정사(正史)이며, 그 당대 <중종실록>이 아니라 50년이 지난 1568년 선조 1년 9월 21일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는 점이 음흉하다. 심지어 사관(史官)은, <중종실록>에서 부주의로 누락됐었기에 <선조실록>에 “대략” 기록하노라고 사뭇 ‘꼼꼼하게’ 적고 있는 것이다. 왜일까. <중종실록>의 기묘사화는 훈구에서 사림을 ‘그렇게까지는’ 도륙하길 바라지 않았건만 중종이 밀어붙인 맥락이 있다. 한데, 죽은 조광조가 성리학의 예수가 되고 조선이 성리학 탈레반 국가가 된 마당에서는 그게 왕조에 부담이 되었던 거다. 해서, 야사에서 가져와 실록에 집어넣었든, 실록에서 야사로 새끼를 쳤든, 2025년에 살고 있는 우리의 과학적 판단에 의하면, 벌레구멍을 사람 손으로 뚫어 쓴 가짜이거나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주초위왕 나뭇잎’ 이야기를 만들어낸 뒤 그것을 이용해 사악한 훈구가 중종을 꼬드겨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각색했다는 합리적 추론에 도달한다.
이른바 ‘홍장원 메모지’ 한 장에 대통령이 내란수괴로 몰렸다. 이 메모지는 버전이 5개다. 홍이 직접 작성했다가 폐기. 보좌관이 홍에게 듣고 재작성. 보좌관이 제 기억을 추가해 재재작성. 여기에 누군가(?) 여러 가필을 한 것. 한데 여기에 또 가필들이 된 다섯 번째 버전을 홍이 ‘원본이라고’ 들고 방송에 나타났다. 원본을 국정원장 관사 앞 공터에서 작성했다고 했는데, 그 시각 그가 국정원 자기 사무실에 있는 CCTV 녹화본이 나왔다. 왼손잡이라고 주장하는 홍이 암만 봐도 오른손잡이인 것처럼, 이 메모지의 모든 것들이 싹 다 정신착란적이다. 대통령에게 들었다는 얘기도 달라졌고, 그 전화를 한 사람도 바뀐다. 재판 증거로서 자격상실된 이 메모지에 대한 의혹의 분량은 책으로도 부족하다.
2025년 우리는 중종이나 선조 때 사람인가? ‘주초위왕 나뭇잎’보다 황당한 메모지 한 장? 다섯 장? 어쩌면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그 메모지 때문에 진실이 사형대에 서 있다. 진실 확인에 정치성향은 필요없다. 조선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면 된다. 나는 진실의 힘을 믿는 만큼 거짓의 힘도 안다. 저 메모지를 갉아먹으면서 사람 이름들을 썼다는 그 벌레들이 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