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고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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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의 시선] 고통의 힘

쿠마라지바는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 사이에 놓인 쿠차왕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녀였고 아버지는 인도에서 망명한 귀족이었다. 푸른 눈의 유럽계 백인 쿠마라지바는 35세에 이미 서역(西域)의 명승(名僧)이 돼 있었다. 훗날 그는 석가모니의 제자 성인(聖人)들보다 불교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됐지만, 그 무렵까지의 그 아름다운 삶 때문이 아니었다.

384년 전진(前秦)의 장군 여광이 7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왔다. 쿠마라지바는 포로가 돼 끌려간다.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에 무지했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요사스러운 도사(道士) 취급하며 온갖 모독을 가했는데, 낙마(落馬)시켜 질질 끌고다니는 것은 그런 짓들 가운데 별일이 아니었다. 여광은 악마처럼 굴었다. 쿠마라지바의 육신만 살려둔 채 나머지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파계(破戒)’였다. 쿠차왕국의 공주(쿠마라지바의 사촌)를 쿠마라지바의 방 안에 넣고는 그녀와 동침하지 않으면 그녀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마왕(魔王)이 자신의 딸들로 싯다르타를 유혹할 적에도 이보다 비열하지는 않았다. 결국, 싯다르타가 악마의 시험을 이기고 붓다로 거듭났던 35세 그 나이에 쿠마라지바는 파계승으로 전락했다. 당시 파계승은 죽느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승려이되 승려가 아닌 죄인이 된 것이다.

서역 전역에 패배주의와 종말 사상이 유행했다. 말법시대(末法時代)의 절망감이 사람들을 뒤덮었다. 이러한 스무 해 가까이의 연금생활 동안 쿠마라지바는 중국어에 능통하게 됐다. 장안(長安)으로 끌려간 그는 후진(後秦) 황제의 명령에 따라 300여 권에 달하는 산스크리트어 불경(佛經)들을 중국어로 번역한다. 이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현장(玄奘)의 불경 번역 260여 년 전의 일이다. 현장의 것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충실한 직역(直譯)으로, 쿠마라지바의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한문 속으로 녹여 스며들게 한 의역(意譯)이라 평가받는다.

쿠마라지바의 번역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불교를 제멋대로 자기들의 여러 본토사상들에 갖다붙여 왜곡하던 이른바 현학(玄學)과 격의불교(格義佛敎)의 뒤죽박죽 엉터리 불교 개념들이 바로잡혔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극락(極樂) 등은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인 쿠마라지바의 번역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신묘한 말들이다.

이러한 쿠마라지바의 의역이 다른 누구의 그 어떤 직역보다 오히려 더 붓다의 본뜻에 부합한다고 각광받는 건 왜일까? 타고난 재능과 노력하는 공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삶과 진리는 직역되지 않는다. 삶과 진리가 잘남과 못남을 떠나서, 깨달을 이에게만 깨달음의 문을 열어주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삶의 지옥 밑바닥까지 나뒹구는 고통이 없었다면 쿠마라지바는 진리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을 것이다.

삶과 진리는 ‘고통의 완성’에 의해서만 규명되는 진실이다. 쿠마라지바는 파계당한 자신을 비웃는 자들에게 ‘더러운 진흙을 보지 말고 그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진실을 봐달라. 그 연꽃의 향기를 맡아달라’고 말했다. 번뇌시도장(煩惱是道場), ‘온갖 번뇌들이 바로 깨달음의 도량이다’라는 것도 그의 번역이었다. 그는 유언도 남겼다. “나는 우매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경들을 번역했다. 그러나 예언한다. 내가 번역한 것들 중 틀린 것은 없다. 그 증거로 내가 죽어 화장(火葬)된 뒤에도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

<고승전(高僧傳)>에 의하면 정말로 그의 혀만 불타지 않았다 한다. “어둠이 램프를 만들어냈고, 안개가 나침반을 만들어냈고, 배고픔이 탐험하게 했다. 그리고 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의기소침한 나날들이 필요했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고통의 뜻을 옳게 번역하는 이가 결국은 승리한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 혼란이나 고통에 빠지지 마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고통을 피하라는 게 아니라, 고통의 혼란에 휩싸이지 말고 진짜 고통의 가치를 알라는 의미다. 불탄 뒤 전부 재가 돼버릴 인간들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다. 당신의 고통이 당신 삶의 증거이자 예언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자에게는 고통의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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