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 삼릉로, 1977년 이란과 자매결연으로 테헤란로 변경
1979년 테헤란 시장 총살형, 구자춘 서울시장은 정치규제
한·이란 멀고도 가까운 사이…테헤란로 번성, 서울로는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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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블락 AP=연합뉴스) 16일(현지시간) 튀르키예 귀르블락 국경에서 이란 시민들이 튀르키예에 도착한 모습. 2025.06.17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강남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테헤란로(강남역~삼성역)의 원래 이름은 삼릉(三陵)로였다. 삼릉은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가 합장된 선릉과 아들 중종 묘의 봉분인 정릉을 합친 말인데, 1972년 서울시가 이 길을 낼 때 인근에 삼릉공원이 있다 해서 삼릉로라 이름 지었다.
삼릉 길이 지금의 도로명으로 바뀐 것은 1977년 6월 팔레비 2세의 측근인 골람레자 닉페이 테헤란 시장의 한국 방문이 계기가 됐다. 닉페이 시장은 서울시와의 자매결연식에서 우의를 다지자는 뜻에서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두 도시에 서로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중동전쟁이 초래한 오일쇼크로 안정적인 석유 공급처가 필요했던 정부는 흔쾌히 동의했고, 그렇게 해서 삼릉로가 '테헤란로'로, 테헤란의 메라트공원로가 '서울로'로 바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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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두 시장이 맺은 친선 결의는 2년도 가지 못했다. 1979년 1월 황실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한 이란 민중의 궐기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테헤란 시장을 거쳐 상원의원이 된 닉페이는 혁명재판소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레비 왕조에 부역하며 뇌물을 챙겼다는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과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서울에선 대통령 박정희가 고향 후배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어 유신정권이 무너졌고, 권력 공백을 틈 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내란을 일으켜 군사독재의 길을 열었다.
박정희의 모교인 대구사범(경북대 사대 전신) 출신으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구자춘은 서울지하철 2호선을 건설하고 내무부 장관이 돼 승승장구하다 전두환의 집권으로 정치규제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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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1977년 서울과 테헤란시의 자매결연으로 생긴 테헤란 서울로. hskang@yna.co.kr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한 루홀라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과 이란 관계는 대리대사급으로 격하되는 등 소원한 관계가 지속됐다. 미국과 이란의 적대관계에 낀 한국은 외교에서 미국 편을 들면서도 경제 면에선 원유대국 이란과 동맹에 버금가는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테헤란로가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로로 성장하는 사이 테헤란에선 기아차의 '프라이드'가 이란의 국민차로 군림하며 서울로를 누볐다. 테헤란로와 서울로는 '멀고도 가까운' 두 나라 관계를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공습 세례에 테헤란이 텅 비어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도시를 빠져나가는 시민들의 피란 행렬이 이어지는데, 테헤란 서부의 진출로인 서울로도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간다. 불야성인 강남역 네 거리의 모습을 보며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jah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20일 06시05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