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양환]문화유산 파괴도 전쟁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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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장

정양환 문화부장
폴란드 남부에 있는 크라쿠프는 더는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싶은, 보석 같은 도시다. 10∼16세기 폴란드왕국 수도답게 중세 분위기가 물씬하다. 터벅터벅 올드타운을 걷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형형색색 건물들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바로크 양식 등이 뒤섞여 ‘유럽 건축의 교과서’라고도 불린다.

뭣보다 돌길을 따라 바벨성에 올라 바라보는 전망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30km 바깥에서도 들린다는 지그문트 종이 울려퍼지는 탁 트인 도시 풍경. 2019년 출장 때 마음에 담았던 파란 하늘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하마터면 이는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일이었다. 실은 크라쿠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총독부가 상주했던 땅.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이 운영하며 유대인을 도운 법랑공장도 여기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이곳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존중해 차마 포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칫 오판이 있었다면,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이 아름다운 도시를 우린 깡그리 잃을 뻔했다.

‘팔미라의 아픔’ 되풀이 말아야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은 결국 문화유산에도 상처를 입히고 있다. “테헤란의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리는 ‘골레스탄 궁전(Golestan Palace)’이 인근 폭격에 훼손됐으며, 7세기부터 이어진 전통시장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r)’도 일부 파손됐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세계유산 ‘백색 도시’도 이란 공습에 건물 2채가 무너져 내렸다.

이란과 이스라엘이 포화에 휩쓸린 순간, 이는 예견됐던 재앙인지도 모른다. 두 나라는 중동에서 세계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 1, 2위.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로마와 페르시아, 유대 문화의 흔적이 곳곳마다 담뿍 서려 있다.

물론 전쟁으로 애꿎은 희생이 잇따르는 게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다. 개인적으로 문화유산을 다 잃을지언정 억울한 인명 피해가 없길 바란다. 이란 남부 미나브에서 초등학교가 오폭 당해 최소 175명의 아이들이 숨진 참사는 남의 나라 일이라기엔 너무도 가슴 아프다. 하지만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벌어진 뒤 IS(Islamic State·이슬람국가)가 파괴한 ‘팔미라(Palmyra) 유적’를 돌이켜 보라. 그들은 우상 타파와 체제 홍보를 명목으로 “사막의 진주”라 했던 고대 오아시스 도시의 문화유산을 거리낌없이 망가뜨렸다. 대표적 건축물로 1세기 말 축조된 벨 신전은 이젠 출입구 기둥만 남은 채 형체가 사라졌다. 영국 BBC방송은 “당시 IS는 팔미라를 지키려던 학자들까지 공개 참수하며 위세를 과시했다”고 전했다. 최근 많은 전문가들이 복구에 나서고 있으나, 다시 지은들 선조의 향기가 되살아날까.

때론 악의보다 무지가 위험하다

이미 벌어진 피해를 되돌릴 수야 없겠지만, 관건은 의도성(Intentionality)이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최근 국제인도법회의에서도 “문화유산이 의도적으로 복수나 선전, 불법적 이득을 위한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고 한다. 1998년 유엔이 채택한 국제형사재판소 ‘로마규정’은 문화유산 보호를 우선적 가치로 판단했지만, 실질적 구속력이 없다. 일각에서 유적 훼손 등을 전범 재판의 기소 대상으로 삼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현 중동 상황은 시리아 내전 때처럼 대놓고 문화재 파괴를 일삼는 경우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테헤란 법원과 경찰청을 타깃으로 미사일을 쏘면서, 바로 옆에 골레스탄 궁전이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잘못 아닐까. 가끔은 악의보다 무지나 무관심이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선의에만 기대선 안 된다는 걸, 우리에게도 숭례문이 뼈아프게 가르쳐 주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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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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