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당시의 명분은 지역·필수 의료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응급실 뺑뺑이’가 사회적 문제가 됐고, ‘출산 난민’ ‘소아과 원정’처럼 지역 의료는 무너지고 있었다. 의료계 역시 해법은 달랐지만 그 명분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의대 정원을 늘리고 지역 의사를 뽑는다고 해서 지역·필수 의료가 저절로 살아나진 않는다.
의정 갈등 속에서 드러난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도 바뀐 것이 없다. 지역·필수 의료의 붕괴는 원가에 못 미치는 낮은 수가, 수술보다 비싼 검사 수가 등 왜곡된 제도의 결과다. 의사들이 실손보험을 통해 수익 보전에 나서면서 거대한 비급여 시장이 형성됐다. 의료비는 매년 급증한 반면, 환자들의 만족도는 떨어졌다. 그런데 정부도 의료계도 내상이 큰 탓인지 의대 증원 이후 의료 개혁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
의정 갈등에 휘발된 신뢰 자본의정 갈등 동안 정부, 의사, 환자 사이에 불신이 쌓인 것도 의료 개혁의 동력을 살리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와 정책 파트너인 의료계는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이제는 물밑 소통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환자들은 의사의 직업윤리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병원에 가면 과잉 진료부터 의심한다. 의사들은 “환자 대면이 두려워졌다” “수술실을 지키는 데 힘이 빠진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모두가 좌절감에 허우적대는데 의사, 환자, 시민단체가 만나 의료 시스템을 고쳐 보자는 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 갈등이 한창이던 2024년부터 의료 공급자인 의사, 의료 소비자인 환자와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모인 의료공동행동이 출범했다. 이들은 그간 논의를 최근 ‘위기의 한국의료, 함께 다시 그리다’라는 책으로 펴냈고 ‘환자중심의료학회’를 출범시켰다.
의사와 환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의료계 학회는 처음이다. 병원과 학교를 이탈한 전공의·의대생을 향해 “진짜 피해자는 외면당한 환자”라고 일침했다가 의료계 내부에서 지탄을 받았던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 4명이 주축이 됐다. 당시 험한 비판을 쏟아냈던 대부분의 의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의정 갈등을 촉발한 시스템을 바로잡자며 환자와 손을 잡았고, 올바른 정책의 근거를 쌓아가기로 했다.
무의미한 싸움으로 남지 않으려면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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