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현수]쓰봉 사재기, 마스크 대란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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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장

김현수 산업1부장
“아무리 그래도 호르무즈 봉쇄는 어려울 겁니다.”

지난달 미국의 이란 공습 직전, 전운이 감돌던 시기에 만난 정유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설마’였다. 봉쇄는 극단적 시나리오라고 했다. 이란은 수십 년간 여러 차례 봉쇄를 언급했지만 실제로 실행한 적은 없었다. 세계 원유 20%가 드나드는 길목을 막으면 자국 경제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격 당시에도 유가는 일시적으로 올랐다가 금세 진정됐다. 이번 전쟁 초기 시장이 비교적 차분했던 이유다.

1970년대와 다르다는 착각

미국도 ‘설마’ 했다는 정황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참모들은 이란을 공습하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란이 봉쇄하기 전에 상황이 종료될 것이고, 봉쇄하더라도 미군이 막을 수 있다고 봤다. 1970년대 오일쇼크 때와 달리 미국이 에너지 자립을 이뤘다는 자신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실은 미국의 가정을 모두 뒤집었다. 이란은 사실상 봉쇄를 단행했고, 핵심 원유 공급 실종 사태가 현실이 됐다. 미국은 에너지 자립을 이뤘다고 해도 ‘가격’ 독립은 불가능했다. 유가는 글로벌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제 유가 폭등은 미국 휘발유 값부터 직격했고, 말 그대로 모든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로 증시 개장 혹은 폐장 즈음에 ‘잘되고 있다’는 취지로 소셜미디어에 글을 쓰는데, 이젠 초조함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호르무즈 봉쇄 충격에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글로벌 경제의 ‘약한 고리’들이다. 중동 에너지 의존도는 높으면서 비축유도, 정제 산업 기반도 부실한 국가들이다. 필리핀은 국가 에너지 비상 사태를 선언했고, 인도나 베트남은 원유 부산물인 액화석유가스(LPG)가 없어 음식점마다 비상이 걸렸다.

팬데믹 공급망 쇼크의 재연에너지 쇼크, 공급망 병목,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복합 위기는 한국도 강타하기 시작했다. 원유에서 추출되는 ‘산업의 쌀’ 나프타 수급 차질로 쓰레기봉투나 기저귀 사재기가 벌어지는 심리적 공포도 커졌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 마스크 한 장을 받으려 줄 섰던 것이 재연되는 모양새다. 마스크부터 차량용 반도체까지 동이 난 팬데믹 공급망 쇼크, 뒤이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고물가와 고금리라는 긴 터널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이제 겨우 그 터널 끝에서 인공지능(AI) 경제에 올라타 빛을 보나 싶은 찰나에 이란 전쟁이라는 복합 위기를 또다시 맞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이 세계 5대 석유제품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도 수입 원유를 정제한 뒤 고부가가치의 석유제품으로 가공하는 최고 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있다. 정제시설이 없어 산유국이면서도 석유제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호주나 인도네시아와 비교하면 한국은 그나마 민간 여유분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여유분도 조만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민관이 파트너십을 발휘해 함께 원유 수급 전쟁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휘발유 가격을 두고 과도하게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기업의 석화 제조 기반이나 글로벌 네트워크는 원유 수급전에서 레버리지로 활용될 수 있다. 팬데믹 시기 한국 제조 역량을 활용한 백신용 주사기가 코로나 백신 확보의 지렛대가 됐던 경험이 있다. 민관이 힘을 합친 덕분이었다.

팬데믹 공급망 쇼크의 교훈은 또 있다. 세계 경제는 쇼크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 시대에서 자국 중심의 산업안보 시대로 급격히 전환됐다. 호르무즈 봉쇄 이후의 세계는 에너지 안보 전쟁까지 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민간의 제조 역량과 정부의 외교력을 하나로 묶는 ‘전략적 원팀’만이 새로운 에너지-산업 안보 전쟁의 파고를 넘을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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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1부장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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