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창조산업 위해 ‘YBA’를 키웠다… 허스트 전시가 던지는 질문[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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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허스트를 키운 것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개인전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중 ‘약국 레스토랑의 미술관 디스플레이’. 사진 출처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개인전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중 ‘약국 레스토랑의 미술관 디스플레이’. 사진 출처 뉴시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영국의 쇼핑 문화 중 우리와 다른 점으로 대형 약국이 있다. 웬만한 마트 규모의 약국이 동네마다 거리마다 있다. 우리가 ‘건강과 미용’ 매장에서 화장품을 즐겨 산다면, 영국인들은 약을 즐겨 사는 셈이다. 의약품을 마치 마트의 식료품처럼 대규모로 유통하는 문화가 우리에겐 낯설게 다가오는데, 이런 영국식 약방을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날 수 있다. 3월 20일∼6월 28일 열리는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61)의 개인전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의 한 전시장은 의약품과 해골 모형으로 가득하다.》

사실 이 전시 공간은 1998년 허스트가 영국 런던 노팅힐에서 ‘약국(pharmacy)’이라는 이름으로 낸 레스토랑을 재현한 것이다. 그는 이 레스토랑의 안팎을 진짜 약국처럼 꾸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전시해설서는 “우리가 현대의학에 부여하는 권위가 어떤 시각적 경험에 기반하는지 드러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비록 음료나 음식은 없지만 그의 ‘약국’ 레스토랑이 주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즐겨 보는 건 어떨까.

이번 전시를 보고 나서 나는 허스트를 팝아트 계열 작가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팝아트라 하면 196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활약한 앤디 워홀을 떠올릴 수 있다. 이에 네오 팝 아티스트로 놓고 미국의 제프 쿤스나 일본의 무라카미 다카시 같은 작가와 같은 선상에서 보면 그의 작품 세계가 더 잘 읽힐 것 같다.

일반적으로는 허스트 하면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영국 86세대 작가들의 대표주자이며, 죽음이라는 까다로운 주제를 탐구하는 실험작가로 설명한다. YBA라는 타이틀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자.

허스트는 미대 2학년생이던 1988년 7월, 런던 도크랜드의 폐창고에서 동료들과 ‘프리즈(Freeze)’, 번역하면 ‘꼼짝 마’라는 전시를 기획한다. 그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큐레이터이자 홍보 전문가의 능력을 이때부터 보여준다. 개성 강한 골드스미스 미대생 16명을 묶어내면서, 런던 항만청을 설득해 낡은 창고를 빌려 이를 전시장으로 쓴 것도 대범했다. 이에 더해 허스트는 테이트 미술관 관장 니컬러스 세로타, 컬렉터 찰스 사치 같은 당시 영국 미술계의 거물을 초대하는 데 성공한다. 한 화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연락처를 확보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프리즈전은 마네의 1863년 ‘낙선전’이나 인상파의 1874년 ‘무명 작가전’처럼 미술사에 길이 남는 전시로 기록된다. 이제 허스트를 포함해 이 전시에 참가했던 16명은 영국 미술계의 ‘앙팡 테리블’이 되어 미술계를 끌고 나간다. 당시 허스트는 23세였고, 다른 작가들도 대부분 20대였기에 통상 이들을 YBA로 묶어 부른다.

이후 허스트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천년’(1990년),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년) 같은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으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는다. 그리고 199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고, 서른 살이던 1995년에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터너상(Turner Prize)을 수상한다. 여기까지, 아니면 1997년 사치가 기획한 센세이션전까지가 허스트의 최전성기였다. 20대 중반부터 스타였던 그도 올해로 61세가 됐다. 그가 추구한 작품 세계의 전체상도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허스트를 네오 팝아트 작가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속에서 벌어지는 생산과 소비 패턴을 닮거나, 상업주의를 즐기는 유쾌한 작가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1부의 청재킷, 프라이팬, 헤어드라이어를 활용한 작품은 기성품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팝아트의 문법과 결이 맞다. 여러 색깔의 점을 반복하는 스폿 페인팅도 대량 생산의 메커니즘을 응용하고 있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년)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허스트.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년)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허스트.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문제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2부의 두 작품 ‘천년’과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팝아트로 읽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개념적 요소가 강해 개념 미술로 보기도 한다. 최근 그의 인터뷰를 본 뒤 충분히 대중 소비사회의 맥락에서 두 작품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셀프 제작(DIY)을 좋아하는데, 특히 이케아의 조립설명서처럼 제품을 분해·조립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이 관점에서 두 작품을 보면 창고형 매장에서 보이는 사각틀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튼튼하게 프레임된 상자 안에 죽고 사는 문제가 들어가 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잘 조절된 메시지일 뿐이다.

사실 YBA 작가를 현대미술의 보급판으로 보는 시선은 영국 내부에서 일찍부터 있었다. 코톨드 미술사연구소 줄리언 스탈라브라스 교수가 1999년 펴낸 ‘상위 미술의 경량화: 1990년대 영국 미술’가 그것이다. 이는 YBA 작가에 대한 냉소적 평가로 볼 수 있지만, 현대미술을 대중의 언어로 접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적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YBA라고 하면 사치의 후원을 주목해 보곤 한다. 광고회사를 경영하면서 미술품을 수집하던 사치는 프리즈전 이후 미국 작가의 작품 대신 YBA 같은 영국 작가의 작품 수집에 열을 올린다. 그는 허스트의 ‘천년’을 구매하고, 상어 작업을 위해 5만 파운드를 미리 지불한다. 그 덕분에 허스트는 남태평양에서 상어를 구해와 이를 사각 프레임의 수족관에 넣고 폼알데하이드를 가득 채운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를 통해 허스트를 포함한 YBA의 성장 과정이 영국 정부가 야심 차게 추구하는 창조산업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영국 문화미디어스포츠부(DCMS)는 1998년 ‘창조산업 매핑 문서(Creative Industries Mapping Document)’를 발간한다. 영국의 경제 구조를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창의성 기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자고 선포한 문건이다. 여기서 미술은 13개의 중점 분야 중 하나이지만, YBA 작가들의 급부상과 함께 영국이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젊고 창의적인 이미지를 얻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런던 템스강 남쪽의 폐기된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 2000년 5월 테이트 모던이 개관하면서 런던은 세계 현대미술계의 핫플레이스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허스트의 급성장에는 영국 정부나 미술계의 시의적절한 지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1992년, 1995년 터너상 후보에 두 번 오르면서 결국 1995년에 상을 받게 된다. 그사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을 앞두고는 테이트 모던이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초대형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의 성장 과정을 DCMS가 그린 큰 그림 속에서 보는 이유는 영국과 한국 미술계가 구조적으로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4명의 후보를 지명한 후 최종 심사를 거쳐 수상자를 발표한다는 점에서 터너상과 유사하다. 영국이 화력발전소를 테이트 모던으로 재생했다면, 우리는 기무사 건물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변모시켰다. 여기에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가 올해 예정대로 개관하면 외적으로는 한국판 테이트 모던이 나오게 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1995년에 한국관이 생기면서 본전시가 아니더라도 한국 작가가 참여할 기회가 많아졌다.

허스트는 1998년 영국 런던에 ‘약국(pharmacy)’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그 모습이 실제 약국과 흡사해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반발로 2003년에 문을 닫았다. 사진 출처 페이스북 캡처

허스트는 1998년 영국 런던에 ‘약국(pharmacy)’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그 모습이 실제 약국과 흡사해 혼란을 줄 수 있다는 반발로 2003년에 문을 닫았다. 사진 출처 페이스북 캡처
차이라면 영국에는 YBA가 있었고, 우리는 YKA(Young Korean Artists)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YBA가 떠오르던 2000년대 초반 우리도 YKA를 만들자는 논의가 거셌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YKA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굳이 영국을 흉내 낼 일은 아니나, 올해의 작가상 등이 힘 있게 운영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번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한 전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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