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다이어 신작 에세이 '라스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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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달이 차면 기우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 어떤 뛰어난 사람이라도 전성기를 지나면 쇠퇴하기 마련이다. 소설부터 논픽션까지 높은 수준의 저작물을 지속해서 발표한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가 새로 낸 책은 그렇게 전성기를 지나 점점 쇠락해가는 천재들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천재들의 '끝'을 다뤘다. 에세이 제목은 '라스트 데이즈'(The Last Days of Roger Federer)
저자는 가수이자 시인인 밥 딜런을 비롯해 소설가 DH 로런스, 화가 윌리엄 터너, '악성' 베토벤, 철학자 니체,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등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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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연합뉴스]
딜런은 저자에게 늘 '최애' 가수였다.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비치 보이스나 퀸의 노래는 특정한 나이가 넘으면 못 듣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철학적 가사를 담은 담백한 딜런의 노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특정한 순간의 진실이 그를 통해 충실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경험은 지속적인 쾌감을 주었다. 그러나 잦은 공연과 나이 탓에 그의 목소리는 "장엄한 폐허"가 됐고, 더는 공연에서 들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목을 그렇게 혹사시키는데, 롤링 선더 투어 내내 밤마다 혼자서 모든 노래를 힘껏 부르느라 목에 말도 안 되는 부담을 가하는데, 어떻게 그 목소리가 엉망으로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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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테니스계의 최정점에 서 있었던 페더러도 그랬다. 그는 역대 최강은 아닐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테니스를 구사한 선수였다. 페더러는 빨리 움직여 상대 선수가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았다. 베이스라인 가까이에 서고, 공을 재빨리 되받아치며, 점차 랠리 시간을 단축하려 시도했다. 우아한 그의 한손 백핸드 리턴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젊은 날, 그가 평정한 테니스 코트에서 "미학과 승리"는 함께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적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백핸드는 나달의 톱스핀 포핸드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받았고, 조코비치의 끈질긴 승부욕과 리턴에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렇게 낯선 패배의 기운이 그의 삶을 점점 장악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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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마니교적 이원론에 탐닉한 니체는 서서히 어두워지는 정신의 황혼 속에서 점점 미쳐가 10년 동안 산송장처럼 누워 지내다 삶을 마무리했고, 빛에 취해 온평생 빛 그림을 그렸던 터너는 태양을 너무 자주 보다가 점점 시력을 잃어갔다. '비트 문학'을 열어젖힌 소설가 잭 케루악은 술과 마약으로 삶을 탕진한 후 다시는 '길 위에서' 같은 경지에 오른 소설을 쓰지 못했다. 육체를 찬미한 20세기 영국의 혁명적 소설가 로런스는 심각한 질환, 요양, 회복, 다시 병이 찾아드는 패턴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그게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찾아왔고, 차선책으로 '버티기'에 나섰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순간이 왔다는 것이다.
"이미 손에 쥔 패가 우리가 가진 전부이고,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잠시 미루는 것뿐인데 그 미룰 시간조차 점점 더 짧아지고 있음이 분명해지는 때가 온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조차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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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을 쓴 저자 자신도 시간의 숙명, 즉 '쇠락'에서 벗어날 순 없다. '라스트 데이즈'는 '끝'에 대한 뛰어난 에세이지만, 30여년 전 그가 젊은 시절에 쓴 '그러나 아름다운'(But Beautiful·1991)과 같은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진 못한다.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재즈의 독특한 미감과 즉흥성을 가로지르고, 젊음의 천재성과 지성이 깃들었던, 그 아름다운 책 말이다.
하지만 때론 박장대소를 터뜨릴만한 유머를 품고 있고, 노년의 따뜻함과 깊은 지성, 솔직함과 함께 삶에 대한 높은 안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이어가 예순이 넘어서 쓴 이 책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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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데이즈'는 분명 끝에 대한 이야기지만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숙자로 전전하다 인생 말년에야 비로소 빛나는 재능을 보였던 소울 가수 찰스 브래들리나, 드물게 전성기 기량을 되찾고 말년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던 색소폰 연주자 아트 페퍼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시인 T.S 엘리엇은 말했다. '모든 끝은 시작'이라고.
서민아 옮김. 468쪽.
buff27@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7월03일 12시43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