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컬렉션을 갖춘 사립박물관이 넘치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는 명실상부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사립박물관이 그리 많지 않다. 가치 있는 유물을 계속 구매하고, 수준 높은 대중 전시를 기획하며, 관련 연구를 병행하는 박물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대형 사립박물관 하면 먼저 떠올리는 곳은 삼성그룹 뮤지엄 리움과 호암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리움과 호암에 필적하는 컬렉션을 갖춘 사립박물관이 있다. 바로 호림박물관이다. 개성 출신 기업가 윤장섭이 자신의 호인 호림(湖林)을 붙인 곳으로, 호암과 같은 해인 1982년 개관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국내 사립박물관 가운데 ‘투톱’이라고 단언할 정도인 호림박물관은 국보 8건 16점, 보물 46건 51점 등 토기, 도자기, 회화, 전적, 금속공예, 목가구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재를 무려 1만5000여 점 보유하고 있다.
호림이 리움과 호암에 비해 대중에게 생소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박물관 창립자인 호림 윤장섭(1922~2016)의 성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본질에 집중하고 허명(虛名)을 경계하는 개성상인 특유의 기질이 박물관 운영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윤장섭은 생전 언론 인터뷰 요청을 거의 거절했다. 심지어 문화재 수호 공로를 인정해 정부가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할 때조차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다녀왔을 정도다.
윤장섭은 정미소를 운영하며 중국과 무역을 한 개성상인 부친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 무역업, 증권업 등으로 큰 부를 일궜다. 1960년대 성보실업, 유화증권 등 굴지의 기업을 일으켜 기업가로서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1969년 어느 날 그에게 훗날 차례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황수영이라는 당대 최고 고고미술사학자들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월간지 <고고 미술> 발간 비용이 없어 애를 태우다 같은 개성 출신 윤장섭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고미술에 관해 딱히 잘 알지 못하던 윤장섭이지만 자신의 부를 가치 있는 일에 쓰고 싶다는 생각에 흔쾌히 비용을 지원했다.
이 만남을 통해 윤장섭이라는 기업가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계속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막대한 사재를 들여 문화재 소장이라는 숭고한 사명에 헌신한다.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이른바 ‘개성 3인방’으로 불리는 불세출의 미술사학자들은 윤장섭에게 반드시 소장해야 할 귀한 문화재를 판별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해외에 뺏길 뻔한 무수한 우리 문화재를 수호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업적이지만 호림의 더욱 의미 있는 행보는 한국 사립박물관 시스템의 매우 바람직한 선례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는 생전에 성보문화재단을 세운 뒤 일생에 걸쳐 모은 문화재 1만5000여 점의 소유권을 넘겼다. 개인 소유의 부동산과 유가증권 등 막대한 수입원 또한 이 재단에 기부했다. 자신의 사후 수백 년이 흘러도 박물관이 재정난을 겪지 않는 시스템을 굳건히 만든 것이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초월한 사람 사이의 교감을 꿈꾼’ 개성상인 호림 윤장섭의 멋진 꿈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가 남긴 1만5000여 점의 소중한 문화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압도적 예술을 누리고 있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지만 어떤 인생은 한바탕 봄꿈처럼 덧없기만 하진 않다. 그걸 방증하는 이가 바로 호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