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된 약물[이은화의 미술시간]〈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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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몸은 끊임없이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영양제로 활력을 채우고 수면제로 밤을 달래며, 질병의 고통과 불안을 잠재우려 기꺼이 화학물질에 의존한다. 우리는 스스로 건강을 관리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약물과 처방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할 수 없는 깊은 종속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규제 물질 단서 페인팅’(1994년·사진)은 바로 이 지점을 시각화한다. 흰 캔버스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된 색점들은 얼핏 단순한 추상 회화 같지만, 각각은 실제 약물 이름과 연결된 기호다. 제목의 ‘규제 물질’은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된 약물을 뜻한다. 작품은 회화라기보다 현대 약물 체계의 서늘한 도식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이 철저히 통제된 화면을 작가가 직접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허스트는 의사 처방 참고서(PDR)에서 약물 이름들을 발췌해 규칙만 설계했을 뿐, 붓을 든 것은 조수들이었다.

이 기계적 생산 방식은 예술과 자본이 결탁한 블랙코미디로 이어졌다. 2004년 작가는 “점 회화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며 연작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작품은 오히려 그 이후 폭발적으로 증식했다. 급기야 2012년 전 세계 11개의 가고시안(거고지언) 갤러리에서 수백 점의 ‘점 회화’가 동시 전시되며 전례 없는 흥행을 기록했다. 작가의 손은 멈췄지만, 공고한 생산 시스템과 투자처를 좇는 미술 시장의 끝없는 수요는 결코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의 중단 선언마저 마케팅 전략이 된 이 역설은 제약 산업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생명 연장이라는 명분 아래 약물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며, 우리는 그 체계에 깊이 의존한다. 약물은 이제 단순한 치료제를 넘어, 불확실한 삶의 불안을 지탱해 주는 새로운 신앙이 됐다. 허스트의 색점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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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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