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통행세로 지리적 지배력 과시
이후 산업 보호 수단으로 관세 활용
트럼프 대통령 반도체-車 관세 인상
중국 견제 목적의 패권 도구로 활용
● 중세 유럽 관세는 ‘지리적 지배’ 상징
인류가 교역을 시작한 이래 상품의 이동은 언제나 지리적 제약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강줄기, 산지의 고개, 전략적 요충지의 항구 등은 필연적으로 상품이 드나드는 지리적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자연스레 이 관문을 통과하는 상품에 통행세를 부과했는데, 이것이 관세의 원초적인 형태였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은 항구, 국경, 주요 도로의 진입로 등 제국의 관문마다 이를 드나드는 상품에 대해 ‘포르토리움(portorium)’이라는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재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제국이 지리적 관문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인강이 수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동맥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영주들은 라인강을 따라 자신의 영역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했습니다. 이는 해당 영주가 라인강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통제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초기 관세는 재정을 충당하는 수단 외에도 지리적 영역에 대한 지배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인위적 관세 장벽은 지구촌 모두의 손해
초기 관세가 지리적인 길목을 통제하고 영역을 확정하는 역할을 했다면, 근대 이후 관세는 국가 산업을 보호하고 키우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생 국가들은 자국의 약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책정했습니다.
미국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높은 관세 정책을 펼칩니다. 미국의 첫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신생 국가인 미국이 강대국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정부가 관세를 높여서 다른 나라 물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정책에 따라 미국은 19세기 내내 높은 관세를 유지하며 산업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높은 관세를 통해 저렴한 유럽 공산품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것을 막았고 그 사이 미국의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관세 정책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미국이 시행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입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무너진 경제를 부흥시키고 국내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크게 올렸습니다. 관세를 높이면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지고 미국 국민이 수입품 대신 국산 제품을 소비하면서 기업이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 관세 정책은 오히려 미국의 경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이 관세를 올리니 다른 나라들도 보복적으로 관세를 올렸고, 결국 전 세계 무역량 감소와 경기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국가 간 경계를 넘어 물건이 움직이는 공간에 관세라는 인위적인 벽을 과도하게 세우면 지구촌 모두의 손해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트럼프가 실패한 정책을 다시 꺼내 놓은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이라는 실패한 역사를 알고 있음에도 왜 다시 관세를 높이는 정책을 펼칠까요. 답은 지금 미국은 1930년대 미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미국의 경제 규모는 당시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세계 최대 소비국입니다.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수출 중심 국가들이 미국의 높은 관세에 보복 관세로 대응한다면 미국이라는 중요한 손님을 잃게 됩니다. 둘째, 미국산 제품의 위상이 크게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1930년대 미국의 주요 수출품은 농산물과 목재에 불과했습니다. 농산물과 목재는 미국 외의 다른 국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소프트웨어, 항공 부품 등 첨단산업의 필수재들로, 미국은 이들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교역하는 국가들이 미국의 관세 인상에 보복적으로 관세를 올렸다간 산업에 필수적인 미국산 첨단 제품을 수입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외에도 이번 관세전쟁의 최종 목표가 미국의 경쟁국인 중국 견제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관세 정책에 맞서기보다는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에는 실패했던 관세 인상 정책을 다시 들고나왔습니다. 문제는 미국의 관세 정책에 의해 피해를 보는 물품 중에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반도체, 자동차 등이 포함돼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까지 함께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리적 공간을 통제하고 활용하려 했던 욕망의 발현인 관세는 결국 돌고 돌아 지구촌 전체를 통제하고자 하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도구로 귀환한 셈입니다. 그 경쟁 과정에서 중간에 끼인 한국의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안민호 마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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