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속연수에 따라 임금 자동 상승… 노년기에 안정적인 삶 유지 도와
성과 중심제는 노력에 따라 보상… 경쟁 심화시켜 협업 저해하기도
세대 간 균형 유지할 대안 마련을
요즘 세대 갈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고령층이 과도한 임금을 받아 청년층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주장입니다. 얼핏 청년 실업과 고령층 고용이 ‘제로섬 게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생애주기적 연공서열 임금 체계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우리는 좀 더 긴 시간의 눈으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설계되는가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탈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랑코 모딜리아니가 제시한 ‘생애주기 가설(Life-Cycle Hypothesis)’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는 이 이론으로 사람이 생애 전반에 걸쳐 소득과 소비를 계획하고 조절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이 연구로 198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생애주기 가설은 오늘날 가계 소비·저축 이론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젊을 때 소득이 적어도 미래 소득 증가를 기대하며 지출을 합니다. 중장년기에는 소득이 늘어나면서 저축을 하고 노년기에는 그 저축을 꺼내 쓰며 소비 수준을 유지합니다. 단기 소득보다 장기적인 예측 가능성과 삶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경제활동을 설계한다는 관점입니다. 한국의 연공서열 임금 체계는 이러한 생애주기적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젊을 때는 조직에서 배우며 낮은 임금을 감내하고, 시간이 지나면 경력과 기여에 따라 보상을 받는 구조입니다. 단순한 임금 규칙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 대한 사회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물론 연공서열에는 단점도 있습니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 상승하면, 고령 근로자의 생산성과 임금 간 괴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고령자 고용을 기피하거나 청년 채용을 꺼리는 유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청년층은 낮은 초기 임금에 대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 노력에 따른 보상, ‘성과 중심 임금제’ 대안으로 성과 중심 임금제가 자주 거론됩니다. 노력과 결과에 상응하는 보상 체계 즉, 성과에 따른 차등 분배는 공정하고 효율적입니다. 분배가 공정할 때 개인들은 최선을 다하게 되고 조직과 사회도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그러나 현실에서 차등 분배를 공정하게 하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건강, 조직 환경, 경기 상황 등 수많은 우연적인 요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준과 척도가 필요한데 수학 정답 같은 해법은 찾기 어렵습니다. 성과에 집중한 임금 체계는 경쟁을 심화시키고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평가의 기준과 척도를 자꾸 의심하게 됩니다. 공정한 분배를 강조하는 성과주의가 사회 전체의 신뢰를 거꾸로 갉아먹는 역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성과가 좋을 때 보상을 많이 해주는 곳이 아니라, 성과가 나쁠 때도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해서 생활의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성과의 원동력은 휴식과 숙고에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의 경험에서도 오기 때문에 단기적인 결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대우하는 구조는 오히려 조직의 잠재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과 중심 임금 체계는 외형상 공정해 보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성원의 창의성과 협업을 저해하고, 장기적 성장을 막는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 세대 갈등 아닌 질서와 신뢰 바탕 체계 개선
고령층 일자리가 청년층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직관적인 인식은 실제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여러 국가의 고용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고령층 고용이 늘었다고 해서 청년층 고용이 줄어든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령자와 청년층은 서로의 역할을 보완하며 조직 내 균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됩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정년은 보장하되 일정 시점 이후 임금을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에서 고령자 고용이 증가하는 경향과 함께 청년 고용 여력도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고령자 임금을 무작정 깎기보다는 예측 가능하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정하면 기업은 새로운 인력을 채용할 여력을 확보하고, 세대 간 균형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청년들이 노년층의 삶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상상한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어르신들이 존중받고 안정적인 소득과 역할을 지닌 채 사회 안에 존재한다면 청년들은 ‘나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반대로 고령층이 내몰리고 경력의 끝자락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청년들은 자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기 어려워집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는 심각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연공서열 임금 체계의 개선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타당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년층이 변화의 걸림돌이라는 오해나 논의의 과정이 세대 갈등으로 비치는 편견이 나타나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임금 체계 개편은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대 간 갈등과 희생을 전제로 하거나, 고령층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보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단절된 순간들의 합이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는 신뢰의 연속체입니다. 생애주기 가설은 소득의 단면이 아니라, 삶의 흐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청춘은 있고 노년과 죽음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임금 수준의 조정이 아니라, 세대를 연결하는 질서와 신뢰를 다시 설계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철욱 방산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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