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풍경] 웅장함에서 풍기는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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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묻힌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선임기자 =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는 동반자이자 갈등 관계였던 인물들로 잘 알려져 있다. 3대 왕 태종(1367∼1422)은 골육상쟁으로도 불리는 '왕자의 난'을 주도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 원경왕후(1365∼1420)는 친정 남동생들과 함께 그를 적극 도왔다. 태종은 형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은 제거됐고 친정은 몰락했다. 태종은 후궁을 많이 뒀는데, 19명이나 됐다. 여기까지가 대략 이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다.

이미지 확대 울타리 앞에서 보이는 헌릉 석물 [촬영 김정선]

울타리 앞에서 보이는 헌릉 석물 [촬영 김정선]

태종의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다. 원경왕후와 태종은 2년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태종에 이어 즉위한 세종 2년에 원경왕후가 먼저 숨을 거두었다. 태종은 이때 자신의 능자리도 미리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세계유산 조선왕릉인 헌릉(獻陵)이 이들의 능이다.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무덤이다.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태다. 권력을 얻는 데 뜻을 함께했으나 뜻을 이룬 후에는 불화가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능은 어떤 모습일까.

일단, 외관이 웅장하다.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석물의 숫자 때문인 듯하다. 무석인과 문석인이 다른 조선왕릉보다 많다. 폐위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은 왕릉 좌우에 문석인과 무석인을 각각 둬서 총 4개를 세운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런데, 헌릉은 모두 8개다. 그 뒤에 말 모양의 석마도 하나씩 있다. 일반 관람로를 따라 올라가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능침을 바라보자 확연하게 그 모습이 보였다. 능침 주변에는 울타리가 처져 있다.

석물도 꽤 커 보였다. 석물의 수와 크기에서 위엄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석인의 얼굴에선 눈과 코, 광대가 툭 튀어나와 보였다. 문석인은 비교적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석물들로 왕릉 앞 공간이 꽉 차 보였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선 헌릉의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 등이 다른 왕릉에 비해 2배 더 배치된 것과 관련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릉과 정릉 제도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현릉과 정릉은 다른 고려왕릉에 비해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지 확대 보물인 '태종 헌릉 신도비'(왼쪽)와 숙종 때 새로 세운 신도비 [촬영 김정선]

보물인 '태종 헌릉 신도비'(왼쪽)와 숙종 때 새로 세운 신도비 [촬영 김정선]

헌릉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으로는 신도비를 꼽을 수 있다. 정자각 오른쪽 옆 비각(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안에 있다. 이곳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 이 중 세종 때 만들어진 '태종 헌릉 신도비'는 보물이다. 맨 윗부분의 문양과 글씨는 보이는데, 밑으로 내려올수록 마모돼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 아래에 있는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은 손상됐지만, 자리를 지키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손상됐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오른쪽에 또 하나의 헌릉 신도비가 있다. 원래의 신도비에서 글씨가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숙종 때 새로운 비를 세웠다고 한다.

헌릉에서는 조선 초기 역사를 짚어보고 이 시기의 왕릉 조성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태종에 대해서도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릉으로서 헌릉은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곳을 찾아가서 둘러보는 동안, 조성 당시 헌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 봤다.

jsk@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28일 08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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