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집행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50년 전의 일이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은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상고를 기각했다. 원심대로 사형이 확정된 8명은 그로부터 18시간 만인 다음 날 새벽 서울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차례로 형이 집행됐다. 그들의 이름은 도예종(당시 50세)·서도원(52)·하재완(43)·이수병(38)·김용원(39)·송상진(46)·우홍선(45)·여정남(30)이다. 평범한 가장,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이날 '1975년 4월 9일'은 우리 사법 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날로 꼽힌다. 당시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가 8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날 형 집행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지탄을 받았다.
이미지 확대
1975년 대법정에서 개정된 인혁당 관련 사건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장면[연합뉴스 자료사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억압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안 조작 사건이다.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인혁당 재건위를 배후로 지목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1천24명이 연행돼 253명이 구속 송치됐다. 그해 6월 시작된 재판은 1심과 2심 군법회의를 일사천리로 거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10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법원은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나머지에는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계속됐고 민주화 시대를 맞아 2002년 9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됐음을 밝혔다.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도 2005년 12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행위와 인혁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실 등을 밝히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곧바로 형사 재심이 개시돼 법원은 2007년 1월 23일 사형수 8명에 대한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다. 국가폭력에 의해 선량한 시민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2년 만이었다. 같은 해 8월 법원은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처벌받거나 숨진 이들의 가족과 유족들은 평생 '빨갱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뒤늦게 무죄 판결이 나고 거액의 배상금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겪은 고통이 쉽사리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겐 50년이 '억압의 세월'이었다. 부당한 국가권력과 이에 예속된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이 개인적인 삵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불행한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된다. 오늘날 우리 역사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4월09일 06시05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