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본래 무대는 시장이지만, 시장 바깥에서 작동하는 정치와 사회 환경도 기업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정부는 중요한 경제주체로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을 육성하기도 하고 규제도 하는 여러 얼굴을 가진 강력한 이해관계자다. 이 때문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 기업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한다. 정부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구호가 등장하지만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출범했다. 국제질서 변환기라는 엄중한 외부 환경은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속에서 출발한 김대중 정부와 유사하다. 더구나 인수위원회 없이 시작된 행정부는 국정철학이 충분히 숙성되기도 전에 5년간의 청사진을 급히 마련해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전임 정부의 조기 퇴진과 대내외 혼란은 불확실성으로 다가오지만, 이는 또 다른 ‘기회’다. 구체적 정책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기업이 이를 보강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 정부는 보수·진보의 전통적 이념 구도를 넘어선 실용주의를 표방한다. 대표적으로 인공지능(AI) 3대 강국, 국력 세계 5강, 잠재성장률 3% 등의 슬로건 속 성장 서사는 분명히 기업을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소환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지금 기업도 호응해 적극 소통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기업의 대응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기업이 비시장 영역인 정부와 사회의 요구를 수용해 기업 자신을 변화시키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해 이들의 요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두 전략을 적절한 수준에서 혼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 정권 초기에 효과적인 정책 협력 사례가 적지 않다. 현대자동차의 수소차 활성화를 위한 세계 최초 수소법 제정 사례를 보자. 현대차는 선도적인 수소차 기술을 가졌음에도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맞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수소경제 활성화’를 슬로건으로 정부가 수소경제를 주도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현대차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 관련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소기업 또한 관련 협회를 통해 대선 정국에 정책제안서를 제시하고 이를 실질적 정책으로 반영시킨 사례가 많다. 중소기업의 기업승계 부담 완화를 위한 ‘상속세 공제 한도 확대’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이 주도한 ‘건강정보고속도로’ 사업 등이 있다.
지금 시점에 기업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첫째, 정책 지형을 분석하고 섬세한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곧 대선 공약을 바탕으로 새 정부 국정과제가 구체화돼 발표될 것이다. 각 과제가 어느 부처, 어느 실무 라인에서 실행될지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무회의 의결 자료, 부처별 업무보고, 국회 상임위원회 질의응답, 정책 연구보고서 등을 체계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둘째, 기업 내부에서는 사업 전략상 중요한 정책 아젠다를 설정하고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규제 완화, 세제 개편, 인력 양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인증제도, 해외 진출 지원 등 부서별 이해관계를 조정해 정부와 소통할 의제를 선별하고, 이를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언어로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 및 관련 정책 파트너와 협력의 언어를 맞춰 소통할 수 있다.
셋째, 정부 부처, 국회, 지방정부, 유관기관과의 접촉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산업단지 정책, 시민단체의 제도 캠페인까지 확장된 ‘멀티 채널 전략’이 중요하다. 이때 단일 창구가 아니라 이슈별로 분산된 접근 방식이 효과적이다. 같은 메시지를 각 기관의 언어에 맞춤형으로 설계하되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유지하는 것이 멀티 채널 전략의 본질이다.
넷째, 정권 초기에는 공모사업과 시범사업을 통한 정책 실험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정책은 이를 추진하는 정부에도 큰 부담이어서 시범사업 등을 통해 그 효과를 검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규제 샌드박스 등 기존 제도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점은 기업의 정책 제안이 수혜자인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어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업 단독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 시민단체, 협회, 학계, 언론 등과 함께 ‘정책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공동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특히 환경, 복지와 같이 갈등 가능성이 있는 이슈는 선제적으로 이해 당사자와 협력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새로 출범한 현 정부의 정책은 아직 설계 단계다. 바로 지금이 창의적 정책으로 정부에 말을 걸 기회다. 메시지를 정제하고, 접점을 조정하며, 협력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기업 정책담당자에게 요구되는 정무 감각이다. 지금은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말을 거는 자만이 다음 질서를 만든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