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업과 신기술은 늘 제도보다 빠르다. 제도는 과거의 문제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라면 혁신은 미래를 먼저 연다. 그래서 정책은 늘 뒤쫓아가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규제 샌드박스’ 제도다. 신기술을 일단 시장에서 실증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한시적으로 유예 또는 면제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개선과 법령 정비로 연결해 나가자는 취지다. 그러나 지금의 규제 샌드박스는 그 본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중요한 분기점에서 제도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정부가 발표한 2024년 기준 자료에 따르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승인된 과제는 1684건에 이른다. 이 중 법령 개정까지 완료된 과제는 불과 16.6% 즉 6건 중 1건 정도에 그친다. 나머지 과제는 특례 기간이 종료되면 임시허가로 전환되거나 법 위반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고, 기업은 사업을 지속할 법적 근거 확보에 실패하게 된다.
규제는 남고, 기업은 떠나는 아이러니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인공지능(AI) 기반 반려동물 비문 등록 기술이다. 이 기술은 동물 등록 시 기존 내장 칩 방식보다 덜 침습적이고 비용이 저렴하며 시민들의 거부감도 현저히 낮다. 기술적으로 상용화 단계이며, 민간기업의 실증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법령이 개정되지 않아 기술이 법 제도권 밖에 머무르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쉬운 기술조차도 제도화되지 못하는 현실은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구조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임시 승인’이 반복되면 시장 전체의 신뢰가 무너진다는 데 있다. 신기술 기반 기업은 특례 승인을 받고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심지어 사업 철수나 해외 이전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신산업 창출 효과도 무력화된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지금까지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은 기업은 약 6900개의 신산업 일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법령 정비 지연으로 인해 이 일자리는 모두 ‘조건부 일자리’에 불과하다. 특례 종료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 그 고용 불안정성은 해당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해관계에 갇힌 입법, 멀어지는 혁신
그렇다면 왜 규제 샌드박스는 법 개정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핵심은 운영 권한의 분산과 책임 부재다. 규제 샌드박스는 국무조정실이 총괄하지만 제도 운영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등 부처별로 나뉘어 있다. 과제 선정과 특례 승인은 비교적 원활히 진행되지만 그 이후의 법령 개정은 각 부처의 의지와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 산업의 반발과 부처 내 이기주의, 또는 정무적 부담 회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입법은 지연되거나 무기한 보류된다. 규제 부처는 기존 산업과의 충돌, 사회적 민원, 이해집단의 반발 등을 이유로 법 개정을 미루는 경향이 강하다. 그 사이 기업은 규제특례 실증 사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시장 진입이 불가능한 사각지대에 갇힌다.
‘시작’ 아닌 ‘정착’의 샌드박스로 가는 길
이제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첫째, 규제 샌드박스의 운영체계를 국무조정실 또는 대통령실 직속 통합 컨트롤타워로 일원화해야 한다. 각 부처의 이해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춘 조정기구가 있어야 제도가 통합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쟁점이 적고 사회적 수용성이 높은 과제는 특례 기간이라도 법 개정 절차에 자동 착수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전 검토 과정에서 ‘자동 입법 전환 대상 과제’를 별도로 지정하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실증 성과가 입증되면 자동으로 국회에 입법 건의를 의무화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셋째, 국회와의 제도적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현행 규제 샌드박스는 대부분 행정부 내에서 운영돼 국회 입법과의 연결 고리가 약하다. 국회가 규제 샌드박스 과제 중 입법이 필요한 사항을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공청회 및 입법 청원 절차를 연계하는 등 입법부의 책임성 있는 참여 구조를 도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참여다. 규제 개혁은 기술자와 공무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이 새로운 기술을 경험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수용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병행돼야 한다. 국민과 기업, 정부가 함께 만드는 규제 개혁 플랫폼이 필요하다.
지금의 규제 샌드박스는 분명 의미 있는 제도다. 그러나 출발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혁신은 출발이 아니라 지속과 정착을 통해 완성된다. 법과 제도 속에 혁신을 심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역할이며 그럴 때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진정한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