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모순을 극복하며 발전한다. 이상적 상태와 불만스러운 현실 사이의 대립을 통해 진보가 달성된다. 헤겔이 시동 걸고 마오쩌둥이 심화시킨 세계관이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의 학살자로 기억되지만 ‘모순론’이라는 새 창(窓)을 제공한 사상가로서 면모가 공존한다.
마오 모순론의 차별성은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구별에 있다. 주요 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처럼 본질적이고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상대적으로 미약한 그 외 모든 갈등은 부차적 모순이다. 주요 모순이 해결되면 부차적 모순도 같이 해소된다는 게 마오쩌둥의 핵심 주장이다.
마오쩌둥은 모순론을 혁명에 적용해 대륙을 장악했다. 부동의 주요 모순이던 ‘계급 갈등’을 부차적 모순으로 격하한 발상의 전환이 주효했다. 대신 제국주의와 반식민지(중국) 간 대립을 주요 모순으로 제시한 뒤 국공합작에 나서 일제를 축출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힘으로 국공내전까지 최종 승리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도 적확한 주요 모순 변경 덕분이다. 덩샤오핑은 1957년 이후 ‘자산계급 대 무산계급의 대립’이던 주요 모순을 1981년 ‘부에 대한 인민의 갈망 대 낙후된 생산력’으로 전환했다. 이후 개혁개방으로 내달리자 생산력이 폭증해 불과 한 세대 만에 주요 2개국(G2)에 올랐다.
시대를 정확하게 읽고 대처하는 능력이야말로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다. 이승만은 신생 독립국의 발목을 잡는 주요 모순이 공산 세력과 자유 세력 간 건곤일척의 대립임을 꿰뚫고 쉼 없이 투쟁했다. 선악·피아 구분조차 쉽지 않은 세계사적 혼란기에 ‘자유인의 공화국’ 수립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박정희도 통찰과 결기의 리더였다. 국민 삶을 위협하는 장애물로 가난과 부패를 지목한 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경제 개발과 구악 일소로 직진해 K기적을 일궈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런 부류다. 좌충우돌 서툴렀지만 그가 앞장서 던진 ‘지방·서민’이라는 화두에 대한 후대의 공감이 시간과 함께 커진다. 이례적인 향수의 배경이다.
21대 대선은 꽤나 혼탁했지만 ‘성장 부재가 주요 모순’이라는 합의에 도달한 점은 소중한 성과다. 예고된 제로성장에서 탈피해 ‘다 함께 잘사는 나라’의 꿈을 다시 피울 수 있어서다. 성장 부재라는 주요 모순이 해소돼야 불평등이란 부차적 모순도 완화된다. 성장에 방점을 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분배에서도 노무현·문재인 정부보다 나았다.
성장 갈증은 흠결 많은 이재명 대통령의 역대 최다 득표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선거 내내 “성장해야 분배가 가능해진다”고 설파했다. “복지를 늘려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게 전 세계가 내린 결론”이라던 3년 전 대선 때와 딴판이다. 분명한 말 바꾸기지만 유권자는 시대와 교감하는 예민함과 유연함에 더 주목했다. 그만큼 성장에 목마르다는 방증이다. 김문수 후보는 그 정결한 삶의 궤적에도 선택받지 못했다. 성장 부재라는 절박한 질문을 등한시한 탓이다.
이 대통령은 성공한 전직을 꿈꾼다. 약속대로 성장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출발은 잘했다. ‘다시 힘차게 성장하는 나라’와 ‘네거티브 규제로의 이행’을 선언한 취임사는 인상적이다. 경제수석 명칭을 경제성장수석으로 바꾼 데서도 결의가 비친다.
‘억강부약의 대동세상’이라는 엇박자 공약을 의식한 이중플레이 유혹을 떨쳐야 한다. 시진핑의 중국이 반면교사다. 시진핑은 ‘낙후된 생산력’이던 문제적 과제를 36년 만인 2017년 ‘불균등 발전’으로 변경했다. 이후 과격한 ‘공동부유’ 정책을 쏟아냈다. 그 방향 착오의 결과가 목격 중인 경제·사회 전반의 급속한 활력 저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실패도 마찬가지다. ‘반국가 세력 척결’이라는 의제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보다 앞세운 과욕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렀다.
진영 논리에 갇혀 성장 담론을 정치화·이념화한다면 최악이다. 진통제 처방을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키는 꼴이다. 조짐이 보여 불안하다. 승수효과가 낮은 민생 지원금, 상법·노란봉투법·양곡법 등 포퓰리즘 관성이 여전하다. 성장 부재를 고착화할 악수다. ‘빛의 혁명 ’을 말하지만, 지금은 성장이 혁명이고 성장을 발목 잡는 일체는 반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