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으로 ‘출장 고문’을 다니며 특진을 거듭했던 이 씨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잠적했다. 11년간 숨어 살았던 그는 1999년 검찰에 돌연 자수했다. 함께 고문을 했던 동료 형사들이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은 걸 보고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다. 고문죄 공소시효도 대부분 지난 상태였다. 이 씨는 납북어부 사건으로만 기소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 씨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5년 복역 중이던 이 씨를 찾아갔다. 당시 김 전 장관이 “어디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가 만든 죄악이지”라면서 용서를 해줬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김 전 장관은 그날 만남에 대해 “나의 용서가 진실인지 반문하곤 한다”고 회고록에 썼다. “고문당했던 기억이 떠오를 게 분명해 면회 가던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해마다 고문을 받은 시즌이 되면 몸서리치게 몸살을 앓곤 했다.” 머리로는 용서했지만 몸에 새겨진 상처를 지우진 못했던 것 같다.
▷이 씨는 2012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란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기자와 만난 이 씨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다.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과하느냐고 묻자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했고, 이 씨에게 고문을 받은 뒤 옥사한 피해자도 있다. 이런데도 이 씨는 자신의 행위를 ‘쥐어박는다’는 정도로 표현했다.▷이 씨는 25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88세까지 살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김 전 장관은 파킨슨병을 앓다가 64세에 눈을 감았다. 이 씨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뒤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은 30, 40년 뒤에야 누명을 벗었지만 당사자가 이미 세상을 뜬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씨는 출소 후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피해자가 힘들게 내민 용서의 손길에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난 그에겐 고문 기술자란 낙인이 역사의 형벌처럼 남게 됐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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