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옮겨 적으며 곱씹는 글맛… 책 읽지 않는 시대의 역설 ‘필사 열풍’[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3 days ago 2

책을 경험하는 세대의 독서법
모든 세대 중 20대 독서율만 증가
‘텍스트힙’ 개성 드러내는 방식 돼
엄선한 글귀, 촉각 경험 주는 필사
손으로 새기며 의식에 각인 효과
전체 읽지 않아도 사유의 힘 키워

독서 인구가 줄고 있지만 청년층을 중심으로 ‘텍스트힙’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독서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책 속 문장을 한 글자씩 옮겨 적는 필사. 디지털 시대에도 손으로 쓰는 필사 독서가 사유를 깊게 하는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 출처 교보문고

독서 인구가 줄고 있지만 청년층을 중심으로 ‘텍스트힙’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독서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책 속 문장을 한 글자씩 옮겨 적는 필사. 디지털 시대에도 손으로 쓰는 필사 독서가 사유를 깊게 하는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 출처 교보문고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책을 읽는 인구가 줄고 있다.

‘독서 왕국’ 일본에서도 책방의 폐업이 잇따르고 있다.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스마트폰이 책을 대체한 지 오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최근 청년층의 독서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75.3%로, 전 연령대 중 직전 조사인 2023년(74.5%)보다 유일하게 상승했다. 이른바 ‘텍스트힙’이라는 말처럼, 젊은층 사이 독서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 돼가고 있다. 도서전 방문, 독서 모임, 필사 등 청년층을 중심으로 경험에 기반한 독서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서점에 가면 필사책을 따로 모아둔 코너가 있을 정도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이 책을 요약해 읽어주고, 강의도 대신 기록해준다. 굳이 글을 읽고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함 과잉의 시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의를 들으며 노트 필기를 꼼꼼하게 하는 성실함이 학생의 미덕이었다. 시험 때만 되면 잘 정리된 노트를 구하느라 애썼고, 복사집에는 아예 강의 노트가 따로 준비돼 있기도 했다. 교수의 인사말부터 기침 소리까지 모조리 담아낸 노트 덕분에 많은 학생들이 만족할 만한 학점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열린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며 책과 관련 굿즈를 경험하는 모습. 사진 출처 뉴스1

지난해 6월 열린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며 책과 관련 굿즈를 경험하는 모습. 사진 출처 뉴스1
그렇다면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캐나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매클루언에 따르면 책은 미디어로서 여러 단점을 갖고 있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를 구분할 때 책은 완벽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핫미디어에 속한다. 읽기라는 시각적 감각을 극대화했기 때문에 다른 감각은 배제된다. 반면 TV는 정보의 밀도가 낮아 수용자가 채우는 부분이 많다. 또한 오감을 두루 충족하는 촉각적 미디어다. 자극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관심이 책 대신 TV나 스마트폰으로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특히 스마트폰은 노래도 들을 수 있고, 댓글을 통해 상호 소통도 가능해 모든 것의 ‘베이스캠프’다. 인터넷과 비교하면 또 어떨까? 책은 선형적 사고를 형성하는 단점이 있다. 책은 1쪽부터 시작해서 2, 3, 4쪽을 순서대로 읽을 것을 강요한다. 자칫 세상도 목차대로 바라보려는 경직된 관점에 빠질 수 있다. 반면 인터넷은 책과는 다른 비선형적인 구조로 돼 있다. 인터넷에는 책처럼 고정된 페이지가 없고 검색에 따라 지식의 층위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인터넷 검색에 익숙한 세대에게 책은 더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제 지식을 잘 암기하는 것보다 인터넷, AI 챗봇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주목받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자기계발, 명언·고전, 베스트셀러 등의 필사책이 인기를 얻고 있다. 유행처럼 퍼지는 필사책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필사는 책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꾹꾹 눌러 쓰면서 촉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연필, 볼펜, 만년필 등 어떤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필사를 할 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모든 글을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명문장만을 골라 적어 보면서 책 내용에 깊이 몰입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눈으로 훑는 것보다 정성스럽게 써본 글이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연필의 사각거림이 좋고 볼펜이나 잉크펜의 매끄러움도 좋다. 만년필은 관리가 불편하지만 색감과 질감에서 잉크만이 갖는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필사책의 내용을 보면 작가와 출판사에서 미리 엄선한 주제로 구성돼 있다. 예를 들어 100일 필사책은 매일 한 장씩 진도를 나갈 수 있도록 분량의 부담을 줄였다. 형식은 왼쪽 페이지에는 명언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를 두고 있다. 디지털이 스크롤을 내려야 하는 ‘세로 본능’이라면 아날로그는 책이든 글쓰기든 ‘가로 본능’의 특성이 강하다. 천천히 종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힘 줘서 쓰는 일은 의식에 각인하는 힘이 강하다.

무엇이든 정성과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꼭 전체를 읽지 않더라도 손으로 꼼꼼히 써본 책의 한 구절이 내 인생에 더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강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적어놨던 대학 시절 노트를 떠올리면, 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무모하게 기록만 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그 당시에는 교수의 말씀을 빨리, 많이 옮겨적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내 머리에 입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최근 많은 책방이 문을 닫고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있자면 디지털 기술, AI가 지배하는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펜으로 직접 옮겨 써보는 필사 경험은 여전히 추천할 만하다.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쓸 때 PC가 아니라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이나 만년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책을 펴 들었다가 한 귀퉁이에 당시 감동을 받아 손으로 적은 메모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필사는 앞서간 창작의 길을 손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한다. 필사를 통해 책은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체험하는 핫미디어가 아니라, 촉각으로 공감하는 쿨미디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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