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의 ‘혼밥러’를 식당에서 마주친다면[2030세상/김지영]

1 month ago 3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혼자 놀기’라면 자신 있었다. 스무 살, ‘혼영’(혼자 영화)을 시작으로 국내외로 혼자 여행을 다녀 버릇하면서 혼밥, 혼술로는 ‘만렙’(최고 레벨)의 경지에 올랐다. 혼자라서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은 곧 자유의 상징이었다.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낯선 여행지에서 홀로 반주를 곁들이는 모습,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임신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니 하고 싶은 일도 줄어든다. 가봤자 집 근처 카페 아니면 영화관이고, 대부분 집에서 소파에 몸을 묻고 철 지난 드라마를 몰아 보며 시간을 보낸다. 혼자 여행은커녕 영화관조차 한번 가려면 화장실 스트레스에 부담이 앞서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얼마 전 주말 혼자 있게 되면서 집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뭐라도 하고 싶어졌다. 본격 육아에 돌입하면 하기 힘들어질 것들을 누려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전시를 보자니 걷는 것이 부담됐고, 뮤지컬을 보자니 화장실이, 재즈 바를 가자니 ‘주류 필수 주문’이 걸림돌이 됐다. 그 밖에 달리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문득 서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보다도 혼자 보내는 시간을 기껍게 고민하던 사람이었는데, 낯설게 솟아 나온 배만큼 스스로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냥 쉴까 하다 오기가 생겼다. 끈질긴 검색 끝에 논알콜 음료 주문이 가능한 재즈 바를 찾았고, 그 옆의 당일 예약 가능한 프렌치 레스토랑을 함께 예약했다.

혼자 애피타이저 두 개와 메인 디시 하나를 시켜 야무지게 먹었다. 임신 후 밖에서 혼자 즐기는 거의 유일한 정찬이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 정도야 일상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들여 스스로에게 요리를 대접한 적은 없었다. 혼자 하는 외출 자체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선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종종 불필요한 주목을 받는 ‘혼밥러’가 심지어 ‘임신부’일 때 왠지 더 사연 있어 보이거나 어쩌면 불쌍해 보이지는 않을까 못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재즈 바를 찾았다. 와인을 곁들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주문한 오미자 음료의 엇비슷한 빛깔로 위안을 삼았다. 재즈 바에 혼자 간 것은 처음이었는데, 문득 뉴욕 여행 중 한 재즈 바에서 만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혼자 맨 앞줄에 앉아 연신 행복한 미소로 리듬을 타던 은빛 머리의 여성. 이후 나의 꿈은 ‘혼자 재즈 바에 가는 할머니’가 되었더랬다. 아직 할머니는 못 되었지만, ‘혼자 재즈 바에 가는 임신부’는 되었다.

귀갓길, 마음이 든든했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변할 테지. 생전 몰랐던 기쁨만큼 생전 몰랐던 좌절도 알게 될 것이고, 그중 어떤 것들은 분명 버겁기도 할 것이다. 이따금 스스로를 잃고 헤매는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만 뭐가 됐든 나는 나와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을 것이다. ‘혼자’를 다잡는 단단한 시간들이 모여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테니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좋은 엄마도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혹여 ‘만삭의 혼밥러’를 마주치더라도 가여워 말길. 그저 오늘은 그것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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