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정치적 무기력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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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당원 시대라는데 유권자는 무기력
후보 마음에 안 들어도 사실상 선택권 없어
보조금 받는 양대 정당은 국영기업 같아
선거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정치의 역동성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오늘날 한국의 양대 정당만큼 많은 당원을 가진 정당은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더불어민주당은 500만 명, 국민의힘은 440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다. 아마 지금은 그보다 더 늘었을 것이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규모다. 1000만 명을 훌쩍 넘는 유권자들, 즉 국민의 4분의 1이 ‘당원’인 나라다. 이것만 보면 위대한 ‘K정치’의 증거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6·3 지방선거를 앞둔 유권자들의 상태는 아무리 좋게 봐도 ‘무기력’에 가깝다. 인구 1000만 명을 흡수하고 있는 양대 정당은 기업에 비유하자면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독점 국영기업 같은 것이다. 정치인들의 노력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무엇보다 소비자(유권자)의 평가나 기업(정당)의 실적과도 무관하게 매년 안정적으로 수백억 원의 보조금이 보장된다. 정당들은 국회 의석 비율에 따라 원내교섭단체인 경우 더 유리하게, 물가 상승률에 연동돼 매년 증액되는 경상비를 수백억 원씩 받는다. 예컨대 이번 지방선거를 치를 보조금 또한 동일한 의석 기준에 따라 후보 등록 마감 직후에 배분될 것이다. 적어도 선거보조금에 있어 중요한 것은 유권자가 아니라 의석수다.

정당이 외부 금권에 휘둘리지 않는 것, 이를테면 사과 박스에 가득한 현금을 주고받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당을 운영하고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정당의 운영과 선거 경비를 국가가 전적으로, 그것도 국회 의석 기준으로 배정하는 것 또한 동의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느 정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아무리 궤멸적 패배를 겪더라도 의원들이 탈당하지 않는 한 동일한 수준의 운영비와 2028년 총선 보조금이 보장된다. 선거공영제를 하다가 우리의 정당이 유권자로부터 유리된 셈이다.

또 다른 근본적인 무기력감도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유의미한’ 대안적 정당들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지역을 기반으로 하거나 진보 이념을 표방했던 정당들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많지 않은 의석으로도 힘의 균형을 좌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16년 총선에서 안철수 씨가 이끌던 국민의당이 등장했다가 쇠락한 이래, 최근 한국 정치는 거대 양당을 벗어나서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을 예외 없이 보여주고 있다. 제3의 대안이 없는 곳에서 내가 지지하는 당이 아무리 실망스럽고 짜증 나더라도 ‘반대 정당’을 찍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실 유권자들의 거대 양당에 대한 실망과 싫증이 심각하고, 새 대안적 정당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다는 것을 실증하는 연구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수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제3의 대안을 ‘공급’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신생 정당의 출현에는 매우 불리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위성정당을 통해 해킹돼 버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전 제도에 비해서도 거대 양당에 더 유리한 제도임이 드러났다. 군소 정당이 비례대표라도 몇 명 당선시키려면 숙주 역할을 할 거대 정당의 ‘승인’이 필요해졌다. 비유를 이어가자면, 양대 국영기업의 독점 구조 속에서 스타트업이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무기력의 근원에는 또한 선거법의 여러 독소 조항이 있다. 2000년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펼쳤던 낙천·낙선 운동을 되새겨 보면, 당시에는 적어도 선거 과정에 대한 시민사회의 상당한 발언권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사는 매우 강력하고 디테일한 선거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시민들의 조직적인 정치적 집회와 표현을 선거 과정에서 점차 제한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쇠락한 것도 사실이지만, 선거 과정은 정당과 후보들의 전유물이 됐고 유권자는 그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제도적 문제들을 우리 정치가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늘 비관적이다. 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 등의 ‘정치관계법’은 위에서 보다시피 정당과 정치인들의 생존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 개정이 개헌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독 심각한 유권자의 무기력감과, 이와는 너무나 무관하게 진행되는 당내 극단주의자들의 권력투쟁을 목격한다. 정치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정당 지지의 해체(dealignment)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전 세계 정당사에서 관찰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유권자 무기력증의 종착역은 고요한 정적이 아니라 파국과 재탄생이었음을 상기한다. 이 선거가, 혹은 그다음 선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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