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호텔로 사장 및 임직원 200여 명을 불러모아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개인이 손바닥만 한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전 세계 누구와도 통화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며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할 핵심은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라고 했다. 삼성의 다음 30년을 좌우할 산업으로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30년 뒤 두 산업의 결과는 반대였다. 반도체 사업은 승승장구하면서 당시 2조700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30조원으로 증가했다. 반면 소프트웨어 분야는 정체의 길을 걸었다.
삼성만 그런 건 아니다. LG(LG CNS), SK(SK C&C·현재 SK AX), 포스코(포스코ICT·현재 포스코DX)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시스템통합(SI) 회사들은 멋있는 사업명과 달리 그룹 주력 계열사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며 비용을 덜어내는 ‘그룹 전산실’로 전락했다. 결국 인재는 SI 회사를 떠났다. 삼성SDS를 탈출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본보기다.
이런 SI 회사들이 그룹이란 둥지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다. AI는 소프트웨어 역할을 바꿔놨다. 그동안 계열사를 통해 쌓아 놓은 제조·물류·금융 데이터와 필요에 의해 지은 데이터센터가 핵심 무기가 되고 있다. 특히 공장과 물류 현장에서 활용되는 ‘피지컬 AI’ 영역에선 데이터는 필수다.
한 휴머노이드기업 관계자는 “산업현장에서 로봇으로 자동화하기 위해선 데이터가 필수적”이라며 “AI가 제조 현장으로 내려오는 순간 고품질 데이터를 보유한 SI 기업이 네이버, 카카오보다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데이터센터를 갖고 있는 삼성SDS와 LG CNS 등이 보유한 그래픽처리장치(GPU)는 1만 개 안팎으로 알려졌다. AI 인프라 기업으로 전환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갖췄다는 의미다.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삼성SDS의 정보기술(IT) 매출 중 클라우드 사업 비중은 2023년 31%에서 지난해 41%로 뛰었다. LG CNS 역시 같은 기간 52%에서 59%로 높아졌다. 그룹 내부 시스템 구축 중심이던 사업 구조가 클라우드와 AI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운영에 AI가 본격 도입되면 SI 기업의 입지는 더 강화된다. 서버 자원 배분과 트래픽 관리 등을 AI가 자동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업무도 SI 기업이 노하우가 많다. 예컨대 고객이 필요한 조건에 맞춰 SI 기업이 데이터센터를 설계하고 구축, 운영하는 사업은 이미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덕분에 매출의 90% 이상을 계열사 내부 거래에 의존해오던 풍경도 사라지고 있다. 이 비중은 작년 각각 81.6%(삼성SDS), 61.3%(LG CNS)까지 낮아졌다. 삼성SDS는 클라우드 고객으로 대한항공, KB금융, 행정안전부 등을 확보했고 LG CNS는 농협은행, 외교부, 경찰청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LG CNS 관계자는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AI·클라우드, 스마트엔지니어링 등 전 사업에서 산업 영역을 다각화하며 외부 사업을 확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AI시대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SI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마련돼 있다. 시장조사업체 모도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한국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 규모는 올해 124억6000만달러(약 18조8000억원)에서 2031년 382억8000만달러(약 57조6000억원)로 커진다. SI업계 관계자는 “클라우드와 AI를 결합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등 사업 구조도 많이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애/라현진 기자 0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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