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를 보여준 이번 판결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시 급박한 상황 탓에 명령의 위법성을 제대로 파악할 겨를도 없이 계엄 실행에 동원된 군인들의 정신적 피해였다. 계엄 이후 8개월이 지났지만 군에 미치는 여파는 여전히 크다. 군 서열 1위 김명수 합참의장까지 평양 무인기 투입 사건과 관련한 수사 대상이 되면서 군의 사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바닥을 치는 모습이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25일 취임사에서 군에 대해 “비상계엄의 도구로 소모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윤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 군인들을 악용한 결과, 군은 존재 이유마저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 당시 “신명을 바쳐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가 군을 사적 도구로 소모한 결과, 대한민국을 지켜낼 안보의 근간이어야 할 군은 쑥대밭이 됐다. 김 전 장관도 4월 옥중 편지로 “자유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며 정치적 순교자 이미지를 부각했지만, 정작 자신이 안보의 심장인 군을 수십 년 퇴보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외면하는 모습이었다. 군 내부에선 “군사작전마저 수사 대상이 되게 만든 윤석열, 김용현 두 사람이야말로 한국군의 최대 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큰 논란이 되는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을 보자. 이 사건을 두고는 북한의 도발을 유도해 계엄 선포 명분을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주장과 오물 풍선에 대응하기 위한 정상 군사작전이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현역 군인들도 작전의 의도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이 사건으로 앞으로는 북한이 도발하더라도 우리 군이 신속하게 대응 작전을 결정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에선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장교 A는 “앞으로 군인들은 지휘관이 대북 대응 작전 명령을 내려도 ‘혹시 계엄 선포 전 밑 작업하는 건 아닌가’ ‘내가 이용당하는 건 아닌가’라며 명령의 진의부터 끝없이 의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 대응 작전의 신속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장교 B는 “북한이 포격 등 도발을 해도 현장 군인들이 ‘선조치 후보고’ 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문서화된 명령 외에 구두 명령은 훗날 책임을 우려해 거부하거나 최고위급에서 내려온 명령만 마지못해 수행하는 복지부동이 만연해질 것이란 우려다.
문서로 명시된 임무 외에 작전 수행에 있어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해 수행하는 이른바 ‘추정 과업’에 적극적인 군인은 앞으로 더는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란 우려도 크다. 장교 C는 “군이 다시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조직으로 돌아가는 데는 못해도 10년은 걸릴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장관은 취임사에서 “상처받은 우리 군의 자부심을 되찾고, 늦은 만큼 더욱 치밀하게 대내외적 위기에 대응할 국방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는 물론이고 대선배라 믿은 군 출신 국방부 장관에게 이용당한 데다 국민적 비난까지 감당해야 하는 군인들의 상처는 이런 조치만으로 아물기 어렵다. 시급한 일은 대부분 군인 역시 헌법 위에서 폭주한 군 통수권자와 그를 추종한 이들에 의해 이용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군 내부에선 시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 판결 이후 “군인들도 윤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군이 나서서 내란 세력에 손해배상 책임까지 엄중히 묻는 것은 군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자 비슷한 일의 재발을 막는 상징적인 조치가 될 수도 있다.이번 계엄과 같은 위헌 행위에 또다시 군이 동원되고, 그로 인해 군이 금전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심한 정신적 피해를 입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그 어떤 첨단 전력으로 무장해도 이길 수 없다. 정치적 도구로 소모됐다는 군인들의 수치심과 무력감은 하루라도 빨리 치유돼야 한다. 그래야만 군이 국가 방위와 국민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다.
손효주 정치부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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