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왕과 사는 이의 정체
단종의 마음에 이입하고 싶은 사람은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읽으면 된다. ‘단종애사’는 단종의 슬픈 마음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의 충정을 드높이고 수양대군(세조)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상대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점에 서면 ‘애사’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단종 사태는 원통한 비극이 된다. 세조의 마음에 이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김동인의 ‘대수양’을 읽으면 된다. ‘대수양’은 단종과 사육신을 미화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도덕을 초월하는 수양대군의 영웅적 결단에 초점을 맞춘다. 이 관점에 서면 ‘대(수양)’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단종 사태는 유능한 경세가가 그에 걸맞은 권력을 쥐는 정치적 드라마가 된다.
그런데 올겨울 최대의 흥행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세조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고, 부재가 존재보다 더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에서 세조의 부재야말로 그렇다. 이 영화는 애써 세조의 존재를 지우고, 그렇게 생겨난 공백을 한명회라는 양반으로 메운다. 그러니 ‘단종애사’와 달리 이 영화에서 세조의 야욕을 위한 공간은 없다. ‘대수양’과 달리 이 영화에서 세조의 영웅적 행보를 위한 공간 역시 없다. 이 영화는 그동안 세조에게 할애됐던 시공간을 궁중정치와 무관한 민초들에게 부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의 시각에서 단종 사태를 바라보면 어떨까. 입에 풀칠하는 게 최대 관심사인 민초라면 권력의 정통성이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굶고 덜 헐벗는 데 관심이 있을 것이다. 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낫게 해주는 사람이 왕이 되기를 바랄 뿐, 왕의 교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영화 제목이 말하는 ‘왕과 사는 남자’가 바로 그러한 민초다. 영화 전반부는 그러한 민초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공들여 보여준다.주인공 엄흥도는 명색이 촌장이지만 전형적인 민초로 그려진다. 유력 양반이 자기 마을에 유배 와서 이른바 떡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유배자가 유배 기간 동안 동네 아이들에게 글이라도 가르쳐 주기를, 서울로 돌아가면 옛 유배지를 위해 온정을 베풀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던 인물이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무시무시한 정권의 압력에 맞서 불쌍한 단종을 도우려는 도덕적 결단을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왕과 사는 남자’ 속 최대 드라마는 세조와 단종의 대결도 아니요, 한명회와 단종의 대결도 아니요, 금성대군(세조 동생)의 ‘역모’ 실패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상식이 되어 큰 울림을 주지 않는다. ‘왕과 사는 남자’가 추진하는 드라마는 민초 엄흥도의 변화다.
이 영화가 아전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했다면 한층 더 흥미로운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실로 조선시대에 아전만큼 흥미로운 존재도 드물다. 양반들은 습관적으로 아전들을 도덕보다 실리를 앞세우는 무리들이라고 경멸했지만, 양반들은 아전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어느 사회든 ‘기능성 잡일’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잡일은 본인이 하기 싫으면 외주를 줘야 한다. 잡일을 해주는 아전이 존재함으로써 양반은 예의를 지키고 고담준론을 할 수 있었다. 엄흥도가 아전이었다면 단종의 최후는 아전이 중앙 권력자들보다 더 도덕적인 존재임을 선포할 기회였던 셈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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