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관세협상이 마감 시한 하루 전에 타결됐다. 주요 경쟁국인 일본, 유럽연합(EU) 등과 동일한 15% 관세율에 합의가 이뤄져 가격 경쟁에서의 불리함은 피했다. 그렇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작년까지도 거의 제로 수준이던 관세율에 비하면 큰 폭의 상승이다. 주요 20개국(G20) 중 대외 개방도 1위인 우리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은 자명하다. 더욱이 관세 합의가 대미 무역협상의 끝도 아니다. 반도체, 철강, 의약품 등 주요 수출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 합의와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3500억달러는 2024년 한 해 우리나라 총고정투자의 60%가 넘는 금액이다. 국내 투자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관세 부담을 극복하고 성장동력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수출 영토 확대, 구조개혁, 산업정책 등의 선택지를 생각할 수 있다. 수출 영토 확대는 한계가 뚜렷해 보인다. 세계 59개국과 22건의 FTA가 발효돼 있고, 10개국과 4건의 FTA가 타결돼 발효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획기적인 수출 영토 확대는 쉽지 않다. 구조개혁은 생산성 제고를 통해 성장과 수출 경쟁력을 모두 잡을 가장 확실한 수단이지만 불행히도 정치·사회 갈등으로 논의가 멈춘 지 오래고 심지어 최근에는 거꾸로 가고 있다. 상법 개정, 노란봉투법, 법인세 인상 등은 모두 기업 활동을 옥죄는 것들이다.
더 늦기 전에 방향 대전환을 통해 제대로 된 구조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구조개혁이 실행되고 성과를 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당장 시급한 성장동력 회복을 위한 우리의 선택지는 산업정책이다. 기존 연구들은 산업정책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결론에 치우쳐 있었으나 지금은 긍정적 시각이 확산하는 추세다. 실제 G20의 산업정책 빈도는 2010년 30여 건에서 2021년 1600여 건으로 급증했다. 가히 ‘산업정책의 귀환’이라 할 수 있는 변화다. 놀라운 것은 그동안 신흥국의 산업정책을 비판하던 선진국이 산업정책의 귀환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지정학적 긴장 고조, 다자주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실효성 상실,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안보와 경제와 기술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글로벌 경쟁의 수단 혹은 대상으로 부상하면서 발생한 변화다.
선진국이 산업정책에 대거 뛰어든 상황에서 우리도 산업정책을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선택 과목이 아니라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필수 과목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은 국제 경쟁에서의 일시적인 열세가 장기적인 열세로 고착되는 소위 이력효과(hysteresis effect)에 민감한 품목들이다. 따라서 일본, EU, 중국 등과 미국 내 시장 점유율을 놓고 출혈 경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미국 관세정책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기업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들이다.
우리에게 산업정책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혼재한 익숙한 정책이지만, 이제는 선진국과의 정책 경쟁이라는 점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경험이 시사하는 산업정책의 성공 방정식은 간단명료하다. 산업정책은 성장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복지와 분배 문제 등은 별도의 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
규제개혁을 산업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아 재정 지원에 앞서 기업 활동의 제약을 풀고, 성과주의에 입각한 단계적·조건부 재정 지원을 통해 지원 대상 기업의 혁신 유인을 높이며 재정 자금의 누수를 막아야 한다. 또한 정책 성과에 대한 상시 모니터링과 주기적 점검을 통해 미흡하거나 잘못된 정책 요소는 적기에 시정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관세협상 타결은 끝이 아니라 더 큰 도전의 시작일 뿐이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추락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국제무역 환경까지 악화된 셈이다. 성장 회복을 위한 정부와 집권당의 역할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경제논리와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과 일관된 집행이다. 최소한 앞뒤 안 가리고 거위의 배부터 가르겠다는 만용만이라도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