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불빛 번쩍, 이상한 냄새… 노인 뇌전증 신호 그냥 넘기지 마세요[이진형의 뇌, 우리 속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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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은 뇌혈관 질환의 경고
영화 ‘미나리’ 순자가 보인 뇌졸중… 언어-운동장애 부르는 뇌혈관 질환
혈관 막힘-출혈-압박, 뇌 손상시켜… 뇌조직 손상되면 뇌전증 가능성 커
뇌혈관 질환 전조-후유증일 수 있어… 조기 진단으로 뇌출혈 등 예방 기대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공학과 교수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윤여정 분)는 미국에 이민 와 농장을 개척하려는 사위와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딸을 돕고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다. 손자는 안 그래도 낯선 할머니에게 혼이 난 뒤 할머니의 음료에 자신의 소변을 타기도 하고, 사위 산 농장은 물이 부족해 전 주인이 농사에 실패한 뒤 자살한 곳으로 드러난다. 딸 부부의 생활고와 갈등은 깊어만 간다.》
손자가 순자의 품에 안겨 잠들던 날 아침, 순자는 뇌졸중이 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순자는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해 왼손에 의지하며 말문이 막히거나 발음이 꼬이는 등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입술이 한쪽으로 돌아가고 얼굴 표정도 부자연스러워진다. 걸을 때 휘청거리거나 치우치는 등 움직임에도 제한이 생긴다.
뇌혈관은 뇌에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뇌혈관이 막히면(뇌경색) 산소와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아 뇌조직에 손상을 입는다. 뇌혈관이 터지는 경우(뇌출혈) 다음의 문제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먼저 뇌조직 내부나 주변에 피가 고이면서(혈종) 이 혈액이 주변 뇌조직을 물리적으로 압박해 손상시킬 수 있다. 또 혈관을 통해 뇌세포에 공급되던 산소와 영양분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거나, 혈관 내 물질이 뇌조직에 직접 들어가면서 독성이 생겨 뇌조직을 손상시킬 수 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는 경우를 ‘뇌졸중’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뇌혈관 구조 이상으로 인한 뇌동맥류, 뇌혈관 기형, 뇌해면상혈관종, 모야모야병 같은 질환들이 있다.뇌동맥류는 뇌혈관 벽이 약해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로 파열 위험이 있고, 뇌혈관 기형은 뇌의 동맥과 정맥이 모세혈관 없이 직접 연결돼 엉켜 있는 혈관 덩어리가 생긴다. 이로 인해 높은 혈압이 정맥으로 바로 전달되면서 뇌출혈을 유발한다. 뇌졸중, 뇌혈관 질환 등이 ‘뇌 속의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이유다. 뇌해면상혈관종은 뇌 내에 벌집 모양으로 확장된 모세혈관 덩어리가 생성되는 양성 뇌혈관 기형이며 저압성 출혈을 유발할 수 있다. 모야모야병은 뇌 속 내경동맥이 원인 없이 점차 좁아지다 막히며, 그 주변에 담배 연기 모양의 미세한 이상 혈관이 생기는 희귀 난치성 뇌혈관 질환이다.
뇌혈관 질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뇌혈관 손상을 일으킨다. 산소나 영양소 공급 중단, 뇌조직이 혈액에 노출돼 생기는 독성, 뇌조직의 물리적 압박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뇌조직을 손상시킨다. 또한 뇌조직이 손상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갑작스러운 반신 마비, 감각 이상, 언어 장애, 시야 장애, 극심한 두통, 어지럼증 같은 증상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영화 ‘미나리’의 순자가 오른손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왼쪽 뇌의 오른손을 관장하는 부분에 손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말을 잘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뇌의 왼쪽에 위치한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순자는 이 같은 증상으로 볼 때 뇌의 왼쪽에 뇌졸중이 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뇌혈관 질환의 증상들이 단순히 뇌 특정 영역의 조직이 망가져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뇌는 복잡한 회로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뇌조직이 어떤 이유로든 손상을 입으면 그것으로 인해 잘못된 신호를 전달하는 뇌전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뇌졸중(뇌경색·뇌출혈) 환자의 경우 2∼10%가 뇌전증을 경험하며, 뇌경색보다는 뇌출혈이 더 위험하다. 중증 뇌내출혈 환자는 1년 이내 뇌전증 발생 가능성이 9.8%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 뇌전증 발생은 뇌졸중 발생 직후(초기)나, 수개월에서 수년 후에 발생할 수도 있다.
뇌전증은 뇌혈관 질환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고, 뇌혈관 질환의 후유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뇌졸중과 같이 혈관이 막히거나 출혈이 있는 경우에는 뇌조직 손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뇌혈관 기형이 있는 경우는 출혈과 같은 긴박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장기간 뇌조직을 압박함으로써 주변 뇌조직의 활동성에 변화를 일으켜 뇌전증이 나타날 수 있다. 뇌전증은 흔히 큰 발작을 일으키는 심각한 경우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국소적인 뇌전증이라면 눈에 번쩍이는 신호가 보이거나 귀에서 없는 소리가 들릴 수 있다. 또 실제로는 나지 않는 냄새를 맡는 등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뇌혈관 질환은 뇌출혈이 일어날 경우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질환이다. 미리 발견하고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전증이 뇌혈관 질환의 전조 증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미리 알아내 치료하고, 뇌혈관 질환도 의심해 봐야 한다. 또한 뇌전증이 중요한 뇌혈관 질환의 합병증이나 후유증일 수 있다는 점에서 뇌혈관 질환 환자에게 뇌전증 관련 검사를 시행하는 것도 좋다. 환자가 뇌혈관 질환을 치료한 뒤 뇌전증을 겪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술을 통한 조기 진단과 치료로 ‘순자 할머니’들이 뇌졸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지 않고 손주들과 행복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